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1세 풍월주風月主 선품공善品公(6) |
보스톤코리아 2021-08-16, 11:26:18 |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김선품은 부인 보룡과 함께 딸 자의, 운명, 야명과 아들 순원을 낳았다. 장녀 자의는 문무왕의 왕후가 되어 소명태자(665년 사망) 와 정명태자(신문왕)를 낳았다. 차녀 운명은 호성장군 김오기의 부인이 되어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을 낳았다. 3녀 야명은 문무왕의 후궁이 되어 아들 인명전군을 낳았다. 문무왕의 어머니 문명태후(김문희)는 정확한 생몰년도의 기록이 없지만 604년생으로 유추가 가능하고, 사망년도는 681년으로 김흠돌의 난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으로 볼 수 있다. 32세 풍월주 신공전의 기록을 보면 흠돌의 난이 태후의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인용하면 “문명태후가 돌아가시자 흠돌 등이 스스로 그 죄가 무거운 것을 알고 두렵고 불안해 했다. 게다가 흠돌의 딸도 총애를 잃었다. 흠돌 등이 이에 모반하였다” 흠돌의 난은 681년 8월8일에 일어 났다. 문무왕은 681년 7월1일에 사망하였고 신문왕은 동년 7월에 즉위하였다. 문명태후의 사망이 문무왕 사망/또는 신문왕 즉위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화랑세기의 기록으로 보아 시간적으로 아주 근접한 시점으로 문무왕 보다 몇 주/또는 몇개월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어째든 문명태후의 죽음은 김흠돌에게는 가장 큰 방패막이 사라졌다. 즉 이모의 죽음으로 가장 든든했던 정치적 후견인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권력유지를 위하여 정명태자(신문왕)의 비妃로 시집 보낸 딸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투기마저 하여 총애를 잃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 전 보룡이 남편 김선품이 죽은 후 김춘추의 궁에서 유모로 있을 때 부터 장녀 자의를 첩으로 들이려다가 거절당한 사건과 이후 자의가 문무왕의 왕후가 되자 보복의 두려움, 또한 보룡 또한 김춘추의 아들인 당원전군을 낳자 그간 이모인 문명왕후의 배경만 믿고 설치다가 뒤바뀐 처지로 인해 불안한 나날은 가중되고 있었다. 뜻을 함께하는 진골무장들과 세력을 규합하여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였지만 어느날 갑자기 문명태후가 죽고, 동시에 문무왕의 병세가 악화되어 갑자기 사망하자, 그 틈을 노리고 진공, 흥원 등과 함께 인명전군을 앞세워 모반하였다. 인명전군은 문무왕의 서자로 후궁 야명(선품과 보룡의 3녀) 이 낳았다. 김흠돌이 정변을 일으킨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와 혈연과 화랑도를 바탕으로 얽힌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보면 짐작이 가능하며 결국은 권력의 유지로 귀속된다. 흠돌의 부모는 달복과 정희로 문명태후(김춘추의 왕후인 문희) 가 그의 이모이다. 즉 문명태후와 김유신의 조카라는 인맥으로 권세를 뽐내면서 가야파 낭도들을 중심으로 사병私兵을 데리고 있으면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그리고 흠돌은 27세 풍월주를 역임(656~662년) 한 후에도 계속 낭정을 장악하고 세력을 넓혀 나갔다. 26세 풍월주인 진공과 흠돌은 사이가 좋았다. 진공이 흠돌보다 다섯살이 위였지만 그들이 작당하여 주모자로 난을 일으킨 681년에는 흠돌의 작위가 높았다.346) 그래서 역사는 그 역모를 ‘흠돌의 난’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사이가 아주 좋았다. 화랑세기를 보면 후임 풍월주를 임명할 때 전임 풍월주의 영향력이 아주 크게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친분이 두터웠으며 인맥姻脈 관계도 형성하고 있었다. 즉 흠돌의 누나인 흠신欠信이 진공의 부인이 되었다. 흠신은 이미 보로전군347) 의 아내로 두 딸을 낳았는데, 색을 좋아하고 마음이 탐욕스러운 진공은 보로전군에게 흠신에게는 몹쓸 병이 있으니 버리고 다른 여자를 처로 맞으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러자 보로전군은 흠신과 이혼하고 다시 김유신의 셋째딸 작광酌光을 아내로 맞았다. 진공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흠신을 아내로 삼았다. 흠돌과 진공은 단짝이 되어 다니면서 어색漁色도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저질렀다. 보로전군과 흠신사이에서 태어난 딸 둘을 꾀어내어 정을 통하기도 했다. 흠돌에게는 생질녀가 되고, 진공에게는 전처의 딸인 의녀인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흠돌의 난’ 의 주모자로 삼간三奸으로 지목되어 처형된 나머지 한 명, 흥원은 누구인가? 27세 풍월주를 지낸 흠돌조에서 좀더 상세히 살펴 보겠지만 흥원은 진평왕의 손자이다. 제24대 진흥왕과 사도왕후 사이에 태양공주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가 조카인 제26대 진평왕(왕의 아버지 동륜태자는 태양공주의 오빠이다)의 후궁이 되어 두 아들 태원太元과 호원好元을 낳았다. 그런데 그들이 진평왕을 닮지 않았다. 즉 태양공주의 방탕한 행실은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태양공주는 어렸을때 오빠인 제25대 진지왕을 섬겼는데 진지왕이 579년에 폐위되자 진평왕을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전과 다름없이 왕을 섬기기 보다는 사신私臣을 늘 옆에 끼고 살았다. 그래서 화랑세기에는 어머니의 행실 때문에 두 아들이 “통統을 얻지 못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통이란 제帝가 될 자격이 아니겠는가? 태양공주의 행실이 좋았다면 왕통이 선덕여왕보다는 태원에게로 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고 보여지는 기록이다. 흥원은 호원의 아들이다. 346) 681년8월8일 ‘삼간三奸’ 으로 화랑세기에 기록된 그들의 작위는 김흠돌이 소판(3등급, 잡찬)이었고, 흥원興元은 파진찬(4등급)이었고, 진공眞功은 대아찬(5등급)이었다. 347) 보로전군의 어머니는 보량궁주 설씨이다. 보량은 16세 풍월주를 역임한 보종의 딸로 어머니는 양명공주이다. 보량의 언니 보라는 김춘추의 첫 부인이며 고타소의 어머니이다. 보량은 처음에 진평왕의 후궁이었으나, 왕의 계비(승만부인)의 질투로 출궁하여 이부동모 남매간인 김양도(22세 풍월주)에게 재가하였다. 그 후 김양도가670년(문무왕 10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옥사하자 따라 죽었다. 그들 사이에는 양효라는 아들이 있다. 보로전군의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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