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1세 풍월주風月主 선품공善品公(2) |
보스톤코리아 2021-07-19, 12:21:02 |
김선품은 634년에 풍월주의 위에 올라 4년간 화랑도를 이끌다가 637년에 부제로 데리고 있던 양도良圖에게 그 직위를 물려주고, 이미 상선으로 내성에 들어가 있던 김예원의 천거로 예부에 들어가 벼슬을 하였다. 그러다가 643년 선덕여왕의 명을 받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불행하게도 거기서 병을 얻어 귀국하여 그 해 사망하였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야망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죽자 왕도 슬퍼하며 그의 작을 아찬(6등급)으로 올려주었다. 졸지에 청상과부가 된 보룡은 자녀 넷을 양육하며 홀로 살았다. 김선품은 장녀 자눌慈訥, 차녀 운명雲明, 삼녀 야명夜明과 외아들 순원順元을 아내 보룡에게 맡기고 떠났다. 아마도 그때 막내 순원는 유아였을 개연성이 크다. 화랑세기의 기록에 보면 문명태후가 아이(선원전군仙元殿君)를 낳았고 보룡에게 젖을 먹여 줄 것을 청한 기록이 나온다. 이 때가 언제였는지 기록은 없다. 문명태후는 문명왕후, 즉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왕비이자 문무왕 김법민의 어머니이다. 또한 김유신의 동생이다. 그런데 김선품이 죽은 해인 643년에는 선덕여왕이 재위 하고 있었다. 김춘추는 654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 선원仙元인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그들(김춘추와 문희) 의 아들이란 기록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전군殿君이란 기록이다. 전군은 왕의 후궁에게서 태어난 아들과, 왕후가 왕이 아닌 남자로 부터 낳은 아들을 일컫는다. 즉 ‘선원전군’ 은 문명태후가 남편인 김춘추가 아닌 다른 남자로 부터 선원을 낳았기에 ‘전군’ 이란 존호가 붙어있다. 그럼 과연 선원전군은 언제 태어났는가? 무열왕이 사망한 후일까, 생존시였을까? 무열왕 김춘추는 602년에 태어나서 661년에 사망하였다. 문명태후(문희)는 681년에 사망하였는데 출생년도의 기록이 없다. 다만 유추해 볼 수는 있다. 큰오빠 김유신이 595년생이고 둘째 오빠 흠순이 598년 생이다. 언니 보희와 문희의 출생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들이 세살 터울이라면 문희는 604년생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김춘추와 문희는 626년에 장남 문무왕 김법민을 낳았다). 그렇다면 무열왕 김춘추가 661년에 만 59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당시 문명왕후는 57세 가량이었다. 여성의 가임기를 고려해 봤을 때, 선원전군은 김춘추가 살아있었을 때 문명왕후가 다른 남자로 부터 출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선원의 기록을 보면, 선원仙元이 아찬(6등급)의 관등으로 신문왕 10년(690년) 2월에 원사元師의 후임으로 중시中侍(시중)가 되어 약 2년 6개월간 재임하였고, 그의 후임으로는 원선元宣이 692년 8월에 그 위를 이엇다는 기록이 있다.344) 신라의 시중은 진골 귀족의 대표자인 상대등을 견제하기 위해 진덕여왕 재위시 처음 시행된 관직이다. 초대 죽지竹旨를 비롯하여 13명의 시중이 선원仙元 이전에 재임하였는데 기록의 내용과 문맥, 그리고 그들의 관등을 봤을 때 모두가 고령이었다고 보는데 무리가 없다. 전임 시중에 비해 비교적 낮은 관등으로 시중에 오른 선원仙元이었지만 젊은 나이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즉 선원이 시중에 오를 때 50세라 하여도 640년생이고, 60세라면 630년생이다. 즉 김선품이 사망한 해인 634년에 선원전군이 태어났다면 그는 56세에 아찬의 관작으로 시중에 올랐다. 그렇다면 문명왕후 문희는 왕후가 되기도 전에 이미 김춘추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추론이 형성된다. 그리고 김춘추가 654년 제29대 왕위에 오르고 문희가 왕후가 된 뒤에 선원은 전군殿君의 존호를 받았을 것이다. 화랑세기에 기록된 “그 때 문명태후가 선원전군仙元殿君을 낳고… 하략” 의 기록은 아마 문명태후가 죽기 전에 김오기가 이미 화랑세기를 집필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고, 또한 태후로 20년간 살다가 681년에 사망했기에 ‘태후’ 로 기록을 한 것이지, 여성의 가임기와 선원의 나이를 유추해 봤을 때 태후의 신분으로 선원을 출산했다고 볼 수는 없다. 김선품과 보룡 부부가 낳은 자녀들이 화랑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후에 선품공의 딸 자의慈義가 문무제의 후后가 되자 파진찬으로 추증했다. 공의 차녀 운명雲明은 예원공의 아들 오기吳起에게 시집갔다. 3녀 야명夜明 또한 문무제를 섬겨 궁주宮主가 되었다. 외아들 순원順元은 높은 지위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처음 공이 죽고 보룡이 혼자 살았다.] 선품은 일찍 죽었지만 장녀 자의가 문무왕의 왕후가 되면서 4등급인 파진찬으로 추증되었다. 선품의 처 보룡도 나중에 태종무열왕의 아들인 당원전군幢元殿君을 낳게 된다. 21세 선품공전의 기록으로는 당원이 정확하게 누구의 자식인지 기록이 없는데, 26세 진공전에는 당원의 부모가 등장한다. 344) 원래 이름은 중시中侍였으나 747년(경덕왕 재위시) 에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의 관직으로서 시중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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