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 한민족 최초의 해외원정을 결행하다 |
보스톤 전망대 |
보스톤코리아 2021-06-24, 12:45:38 |
서기 719년에 발해를 건국한 고왕 대조영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대무예가 뒤를 이으니 무왕이라 하였고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해 인안으로 정하였다. 무왕때 처음으로 일본에 국서를 보냈는데 "여러나라를 아우르고 여러 번국을 감독하니 고구려의 옛 거주지를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지녔다고" 말하며 고구려를 계속 따르겠다고 하였다. 왕권 강화를 위해 수도를 수비, 방어를 위주로 한 동모산에서 왕권강화, 영토확장에 걸맞은 중경 현덕부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무왕은 즉위 초부터 주위의 여러나라와 말갈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영토확장을 계속해 왔다. AD 726년에 흑룡강 북쪽에 있는 두막루를 병합하였다. 위서의 기록에 의하면 두막루는 북부여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 무왕에게 망할 때까지 300년을 존속해 왔다고 한다. 발해와 흑수말갈이 영토를 반분했는데 나중에 발해가 모두 차지하였다 (410~726). 발해의 급성장을 지켜보던 당현종은 발해를 견제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722년 흑수말갈의 추장 아소리게가 당현종을 접견했고 두나라는 2년동안 4번이나 만나게 되었다. 급기야 725년에 당현종은 흑수말갈 영토에 장사(長史)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발해를 제끼고 흑수부에 관청을 설치하였다. "흑수말갈은 부족한 물건을 당나라와의 교역을 통하여 얻었다. 이 교역은 발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돌연 흑수말갈이 당에 직접 조공을 함으로 이 질서를 깨뜨린 것이다." 화가 난 발해 무왕은 "흑수부가 우리에게 먼저 알리지도 않고 당나라 관리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당과 공모하여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라며 자신의 아들로 차기 왕위 계승자인 대도리행을 당나라로 보내 항의했다. 그러나 노련한 당현종은 묵묵부답. 이에 무왕은 그의 동생 대문예와 그의 장인 임아에게 흑수말갈을 치도록 명령했다. 대문예는 건국초기에 당나라에서 숙위로 8년동안 머물렀던 경험이 있었다. 대문예는 “지난날 고구려가 강성하여 30만의 군사를 가지고 당나라와 싸웠지만 결국 멸망했다. 지금 발해의 군사는 고구려의 1/3에 불과하다”며 출정을 반대했으나 무왕은 출정을 강행하였다. 대문예가 흑수말갈 국경에서 다시 한번 반대하는 글을 올리자 무왕은 사령관을 대일하로 교체하였다. 그러나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고 말았다. 당현종이 대문예에게 벼슬을 주어 환대하자 화가난 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대문예를 처형하라고 요구했고 당현종은 대문예를 영남으로 귀양 보냈다고 속이고 몰래 피신시켰다. 그리고 무왕은 흑수말갈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난뒤 당현종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무왕은 파격적인 말로 현종을 꾸짖었다. "대국은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속일 수가 있소이까? 바라건대 예전의 청대로 그를 죽이시오 - 구당서" 무왕에게는 믿는 구석이 한가지 있어 큰소리를 칠 수가 있었다. 당나라와 발해 사이에는 거란과 해, 돌궐이 중간에 끼어 있어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를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문예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한창 벌이던 728년에 당에 사신으로 가 있던 대도리행이 갑자기 사망한다. 그러자 우유부단했던 당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져 무왕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경은 당나라의 은혜를 모르고 마침내 짐을 배반하려고 한다. 경이 믿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일 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경이 명을 받들지 않으면 언젠가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당현종의 이말은 발해 차기 왕위 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동생 대문예를 왕으로 세울 수 있다는 암시와 협박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에 무왕은 큰 결단을 내린다. 장군 장문휴에게 당나라 정벌을 명했다. 732년 9월, 압록강과 그의 지류 포석하가 만나는 박작구로 군사를 집결시켰다. 압록강 하류 박작구항을 출발해 발해만을 거쳐 산동반도 등주(펭라이)를 목적지로 하는 한민족 최초의 해외 원정이었다 - 구당서 등주성 전투. 등주는 당수군의 거점이었고 신라, 발해, 일본의 무역선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한무제때는 고조선을 공격했던 수군이 출발한 곳이 등주였고, 고구려를 침공한 수양제의 수군이 출발한 곳이고, 백제를 멸망시키려고 소정방군이 출발한 곳이 등주였고, 30년후인 761년에 이정기 장군이 상륙한 곳이 등주였다. 이처럼 등주는 우리 민족에게는 주저리 주저리 한이 맺힌 곳이었다. 바로 이 등주에서 발해군이 선제 공격을 가하여 당나라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자사 위준은 발해군에게 살해되었다. - 구당서 발해군의 등주 공격은 대성공이었다. 당현종은 급히 장수와 토벌군을 보냈지만 발해군의 기세를 꺽지 못했다. 발해 수군이 당나라에 끼친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등주의 성읍이 파괴되어 이를 복구하는데 긴 세월이 필요했다. 당나라는 대문예를 대장으로 삼아 발해군을 막으려 했지만 발해군은 이미 오래 전에 철군한 뒤였다. 오히려 무왕은 대문예가 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문예를 암살하려고 당나라에 자객을 보낸다. 733년 1월에 낙양에서 토벌을 준비하던 대문예가 습격을 받았으나 대문예는 도망쳐 살았고 자객들은 모두 체포되어 죽었다. - 신당서 같은 해 733년 1월 당현종은 김유신 장군의 손자 김윤중으로 하여금 10만 대군으로 함경도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추위와 폭설로 아무 성과없이 돌아왔다. - 삼국사기 이는 발해와 척을 지면서 까지 싸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폭설로 사망자가 많이 생기자 발해와 별다른 마찰없이 신라로 회군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왕은 당시 당나라의 변경지역을 공격하던 거란의 지도자 "가돌우"를 뒤에서 지원하면서 무왕 본인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당나라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이때 당나라는 유주의 설초옥에게 군사를 주어 항복한 해족의 군사들과 함께 발해, 거란, 돌궐군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거란군의 기습으로 당군의 패배가 확실하게 되고 해족마저 당군을 배신하자 무왕이 군사를 이끌고 오늘날 산해관 인근의 마도산에 도착했을 때는 당군은 이미 패배하여 전투가 끝나고 있었다. 무왕은 퇴각중이던 당군을 추격해서 구당서의 기록에 6천명을 살해했는데 신당서에는 만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당군은 발해군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요긴한 길목을 막고 큰 돌로 참호를 만들어 400리에 걸치게 하였다." - 신당서 이에 발해군은 거세게 저항하는 당군에 대한 추격을 포기하고 본국 발해로 철군하였다. 당나라는 신라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발해, 거란, 돌궐, 해족으로부터도 돌림받게 되자 발해에 대한 모든 군사행동을 중지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흑수말갈 사건으로 불편해진 당과의 관계를 과감한 군사작전을 통하여 유리한 형세로 끝을 맺게 된다. 이후 무왕은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거란의 가돌우가 살해 당하자 이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당나라와의 우호관계를 복원한다. 732년에 당과의 전쟁에서 잡힌 포로들을 송환하면서 두나라는 적대관계에서 벗어난다. 무왕의 냉철한 판단과 대담한 전략으로 대제국 발해의 앞길을 열어준 그의 지도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후로 당은 발해의 내정에 일체 관여하지 못했고 무왕은 독자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호사다마라고 그 이듬해에 그가 사망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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