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건국 2 |
보스톤 전망대 |
보스톤코리아 2021-06-21, 11:51:34 |
천년을 두고 한민족을 괴롭혀온 말갈 북제서 기록에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2년 AD 563년에 말갈이 역사서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동명성왕 원년, 서기전 37년에 말갈이 준동하여 이를 쳐서 물리쳤는데 이후로는 말갈과 고구려는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해 왔다. 다만 고구려 왕조 말기에 속말 말갈 추장 만돌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말갈에게 제일 많은 침범을 당한 나라는 백제였는데 온조왕 2년과 3년에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왕이 이를 쳐서 물리쳤는데 이들중 살아 돌아간 자는 열에 한두명이었다고 한다. 이어 온조왕 8년(BC 10년)에 말갈군 3천명이 내습하여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닫아 걸고 기다리자, 말갈이 양식이 다해 물러가매 대부현(지금의 평강)까지 쫓아가 500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신라에 말갈이 처음 쳐들어온 것은 6대 지마니사금(AD 126년)때 국경을 넘어 침범함으로 백제 장수 5명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들이 침범한 곳은 지금의 강릉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7대 일성니사금 때는 138년, 140년 두번에 걸쳐 침범했는데 역시 강원도 지경으로 추정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온조왕 때와 지마니사금, 일성니사금 때 쳐들어온 말갈들은 근거리에서 출몰한 말갈로 퉁구스 숙신 계통의 말갈이 아니고 영동, 영서에 나타난 가짜 말갈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있는 기록을 확인해 보면 신라는 말갈에게 모두 15번에 걸쳐 침범을 당했고 백제는 말갈에게 31번 침범을 당했다. 그래도 말갈과 백제사이에는 우호관계를 보여주는 항목도 있었다. 백제 근구수왕 25년에 말갈 추장 나갈이 말 10필을 백제에게 보내준 것이다. 그야말로 병주고 약준 경우였다. 만주에는 7개의 말갈 부족이 있었다. 1)속말 말갈, 2)백산 말갈, 3)우루 말갈, 4)불명 말갈, 5)월히 말갈, 6)철희 말갈, 7)흑수 말갈이 있었다. 속말 말갈은 말갈, 부여의 후손이고 백산은 읍루옥저의 후손이었다. 흑수 말갈을 비롯한 나머지 5 말갈은 퉁구스족들이었다. 원래 말갈족 최초의 조상은 숙신이었다. 만주 동쪽에 살고 있었다. 한나라 때는 읍루라고 불렸고, 5세기 남북조 시대 때는 물길, 수당 시대 때는 말갈로 불렸다. 물갈이란 이름은 스스로가 자칭했던 종족명이 아니라 고구려나 당나라에서 멸시해서 부르는 비속어였다. 그래서 고구려가 망하고 나서 대조영의 속말 말갈은 아예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선언하기도 했었다. 발해가 망한 다음에는 요나라 거란이 개국하는데, 그때 이미 거란에 복속하는 숙여진과 독립을 원하는 생여진으로 나뉘어 있었다. 생여진은 흑룡간 북부에 살고 있는 흑수 말갈로 이들이 완안아골타의 규합으로 금나라를 건국한다. 금나라는 과거 예전에 거란을 핍박했듯이 금나라도 징기스칸의 몽골과 남송에게 멸망을 당한다. 금나라가 처참하게 멸망당했을 때 중원에 살고 있었던 여진족 대부분이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1615년 여진족의 족장이었던 누르하치에 의해 만주 팔기군이 공식적으로 채용되었다.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는 여진족을 만주족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아주 효율적인 정예군을 만들었다. 그러나 조금씩 국방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지금 만주족의 대부분은 만주에 살고 있는데 2000년도 인구조사에서 현재 인구는 천만을 헤아리지만 만주족 고유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상태다. 양만춘과 흑수 말갈 흑수 말갈은 만주 최북단 흑룡강 유역에 살고 있었던 부족인데 추운 겨울에는 땅속에 움집을 파서 살고 있으며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시신을 묻을때 관곽이 없고, 자신이 타던 말을 잡아 본인의 제사를 지냈다. 사람들이 거세고 보병전을 잘해서 다른 부족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흑룡강에 검은 강물이 흐르고 있어 흑수 말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수당 전쟁때는 말갈 전사들이 고구려를 위해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예전부터 말갈 전사들의 용맹은 오랑케중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서기 640년 고구려와 당나라가 싸웠던 안시성 주필산 전투에서 흑수 말갈군이 선봉으로 싸웠는데 당군의 유인책에 빠져 말갈군이 포로로 잡혀버렸다. 그동안 용감하게 싸우는 말갈군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당태종은 3,300명 말갈군 모두를 집단으로 생매장을 시켰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고구려 주력군은 패배했지만 안시성 농성군들은 군민이 일치 단결하여 승리를 일궈냈다. 당시 안시성주가 누구였는지는 역사서에 기록된바 없지만 천년이 지나서 송준길의 동춘당 선생 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익의 성호 사설, 윤근수의 월정만필에서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으로 되어 있고 명나라때의 소설가 웅대목의 소설에서 양만춘으로 기록되어 있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매소성 전투 고구려 말기에 만돌은 속말 말갈 부의 추장이었다. 그가 거느린 병사가 수천명이나 되어 고구려를 노략질하곤 했다. 고구려가 이들을 공격하자 말갈들은 수나라 영주로 귀순해 버렸다. 만돌이 죽고 돌지계가 형의 뒤를 이어 추장이 되었는데 이때 돌지계가 당태종을 도와 공을 세우니 태종이 그에게 이씨성을 하사하였다. 나중에 돌지계의 아들 이근행이 황해도 지경에서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을 세차게 몰아부쳐 부흥군의 활동은 더이상 수행할 수 없었다. 이근행은 황해도 호로하 전투, 석문 전투, 칠중성 전투에서 연전연승해서 신라군이 고전하고 있었는데 672년 매소성 전투에서 3만 미만의 신라군이 20만명의 당나라 군에게 압승을 거두게 되었다. 신라군이 죽이고 빼앗은 말만 30,300필이었고 그에 상당하는 병기를 노회했다고 한다. 당나라 군사의 대부분은 말갈과 거란 군사들이었고 기병들이 많았는데 말갈은 기병 일인 당 가지고 다니는 말의 수가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매소성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에 이근행은 토번과의 전투에 투입되는데 그 다음 전장이 678년의 승풍령 전투로 토번이 당군에게 패배하였다. 이근행이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당 고종의 건릉에 그가 매장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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