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0세 풍월주風月主 예원공禮元公(13) |
보스톤코리아 2021-06-14, 11:52:16 |
648년 12월 김춘추를 수행하여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러 갔던 김예원은 당 태종의 원병 허락/약속을 받아내고 나서 귀국길에 올랐다. 당 태종은 김춘추를 환대하며 벼슬도 내려주었고, 원병의 파병 허락과 함께 떠나올 때는 3품 이상의 모든 관원들을 불러 성대한 환송연도 베풀었다. ‘상납’ 하려고 데리고 갔던 유화遊花들은 당나라 고관들의 배려와 김예원의 자애심으로 무사히 함께 귀국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어지는 화랑세기, [돌아올 때 당나라 사람들은 유화가 말이 통하지 않고 풍토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우나 머물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유화도 함께 돌아 오려고 했다. 종자들이 그들을 버리려 했다. 공이 “부모와 형제가 있는데 어찌 버릴 수 있는가?” 했다. 도중에 적병이 있는 곳을 지날 때 온군해溫君解로 하여금 기신紀信의 계책을 쓰게 하여 벗어났다.] 삼국사기(권 제5, 신라본기 제5) 에 보면 진덕여왕 2년(648년)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군사원조를 청하고 돌아오는 기록이 있다. 그 내용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 “춘추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순라병을 만났다. 김춘추를 따라간 온군해溫君解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배 위쪽에 앉으니, 순라병이 보고 그를 춘추로 여기고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군해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온군해의 기록은 이것이 전부여서 그가 누구인지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다만 김춘추의 충복이기에 그를 대신하여 죽음도 불사하였다. 죽은 후에 왕이 그의 관작을 5등급인 대아찬으로 ‘추증’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신분이 진골인지 아니면 6두품 이하였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대아찬은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이었다. 또한 화랑세기에는 간단하게 한문장으로 온군해의 희생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한 내용은 ‘기신紀信의 계책’ 으로 대신하고 있다. 기신(? ~ 기원전204년)은 전한시대의 사람으로 유방 휘하의 장군이었다. 항우가 이끄는 군사가 유방이 있는 형양성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유방의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지게 되었고 성은 곧 함락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기신은 자신이 유방으로 위장하여 항우에게 거짓 항복을 하는 사이에 (진짜)유방은 성을 탈출할 것을 진언했다. 기신의 계책을 받아들인 유방은 밤중에 형양성 동문으로 2천여명의 여자들을 여군으로 무장하여 내보내 초라나 군대와 맞섰다(여군 무장은 진평의 계책이었다). 그러나 초나라 군대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유방의 여군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다. 그러자 기신은 유방의 수레를 타고 나가 “성 안의 양식이 바닥 나서 이제 항복한다!” 라고 외치니 초군은 만세를 불렀다. 이 틈을 타서 유방은 성의 서문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가짜 유방의 정체를 알고 난 항우는 대노하며 진짜 유방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서문으로 도망을 친 것을 안 그는 기신을 화형시켰다. 유방의 충복 기신은 화형을 당하면서도 항우를 조롱하였고, 그 광경을 본 항우의 군사들은 그의 유방을 향한 충성심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이로 보아 온군해와 기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주군에게 죽음으로 충성한 ‘충신의 표상’ 이 아닐 수 없다. 김예원은 김춘추를 수행하여 당나라에 가서 군사원조의 확약을 받아온 공으로 벼슬이 올라 품주가 되었다가 곧 예부와 이부의 장관(영令)이 되었다. 그리고 673년 집사부의 대등으로 있던 중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죽자 문무왕은 성인을 너무 일찍 잃었다고 슬퍼하며 이찬(2등급)의 김예원을 상대등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화랑세기에 그 내용이 전하는데 삼국사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화랑세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 공功으로 작爵이 오르고 품주稟主가 되었다가 2년 후 예부의 영令으로 나갔다. 이에 이부理府의 영이 되었다. 여러차례 요직에 있었으며 품品이 이찬에 이르렀다. 문무제 13년 집사부執事府의 대등大等(또는 위하부 금하)으로 있으며 관아에서 죽었다. 나이가 67살이었다. 제帝가 슬퍼하여 상대등上大等의 예로 장사를 지내 주었다. 오호! 성인은 진실로 수를 누리지 못하는구나. 공의 덕으로서도 상수上壽를 누리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한편 김예원은 당시 신라의 근친혼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당나라 관리들에게는 신의 뜻에 따른다고 대답하였다. 따라서 귀국 후 그 관습을 고치려고 몇몇 뜻을 같이하는 관리들과 노력하였지만 고치지 못하였다. 하물며 자신의 아들 오기吳起 마저도 누이(보룡)의 딸 운명과 혼인하였다. 즉 오기는 선품과 보룡의 딸인 내외종사촌 운명을 아내로 맞아 김대문을 낳았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사기(사마천),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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