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건국 1 |
보스톤 전망대 |
보스톤코리아 2021-05-31, 11:35:50 |
서기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 당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구와 말갈의 유민들을 당나라의 요서 영주 지방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다. 이들 중에는 고구려 무관이었던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 그리고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가 끼어 있었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지방의 이민족들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운영하고 있었던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와 말갈들의 유민들이 있었고, 이 지역의 원주민 거란과 해족들이 열악한 지역에서 살고 있어 언제라도 민심이 폭발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결국은 영주에서 민란이 터져 버렸다. 그 이유는 기근이 들어 굶주림에 지친 거란의 족장 이진충과 손만영이 백성 구제를 요청했지만 영주도독 조홰는 멸시와 폭정을 계속하자 온 영주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696년 5월 급기야 거란의 추장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를 처단하였다. 당나라는 많은 장수들을 보내어 토벌했지만 반란군의 기세가 강성하여 이를 꺾지 못하고 결국은 돌궐의 카파간 카간에게 도움을 받아 1년만에 이진충을 제거할 수 있었다. 반면에 영주 일대의 혼란을 틈타 걸걸중상 장군과 말갈추장 걸사비우는 유민들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해 요동을 향해 동쪽으로 계속 도주하였다. 이진충의 반란으로 영주에서 감시를 받던 고구려, 말갈의 유민들은 당나라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이다. 당시 당나라 황제 측천무후는 이진충 반란의 여파로 고구려, 말갈 유민들이 자유롭게 풀려나고 요동의 안동도호부가 예전처럼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새로운 시도를 계획하였다. 당나라는 먼저 고구려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요동지역의 충성국왕으로 책봉한 다음에 그 휘하에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 말갈의 걸사비우 추장에게는 허국공이라는 작위를 내린다. 이것은 요동지역에 허수아비 괴뢰 정권을 세워 당나라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려는 속셈이었다. 걸걸중상이나 걸사비우 두사람은 당나라의 지배에 다시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왕조의 국공은 황제를 이은 세번째 등급으로 신하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작위였다. 이는 대조영 집단이 요동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당나라 측천무후의 제안을 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항복한 거란의 장수 이해고를 토벌군 장수로 삼아 공격해 왔다. 당군의 공격을 받은 걸사비우가 전사했고, 걸걸중상 역시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 신당서. 그러자 걸걸중상, 걸사비우의 뒤를 이어 유민들을 이끌게 된 대조영은 말갈족을 다시 규합한 뒤 당나라군을 피해 일단 동쪽으로 후퇴하였다 - 신당서 북적열전. 이에 기세를 탄 이해고의 당나라군은 도망치는 대조영군을 계속 추격하던 중 천문령이라는 요새를 넘게 된다. 천문령이 어디인가 하는 점은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나, 현재 요하 동쪽의 훈화와 휘발하의 분수령인 길림 합달령에 해당되는 곳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후일에 발해에서 거란으로 가는 영주도(營州道) 길목이었다. 천문령 전투에 대해서는 불행하게도 일절 기록된 바가 없다. "이해고가 겨우 탈출해서 영주로 돌아왔다"고 구당서에 기록되었을 뿐이다. 대조영에게 맞서 싸웠던 이해고는 원래 거란의 장수로 거란의 족장 이진충의 양자였다. 이해고는 696년에 이진충과 함께 영주에서 거란족의 반란을 주도했는데 697년 이진충이 죽자 당나라 측천무후에게 항복하였다. 처음에는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재상 적인걸이 측천무후를 설득해 휘하 장수로 삼았다. 천문령 싸움에서는 그가 비록 참패를 당했지만 그 이후에는 당나라의 무장으로 좋은 역량을 보여주었다. 나중에는 측천무후의 신임을 받아 무씨성을 하사받고 700~705년까지 무해고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705년에 당중종이 복위되어 국호가 무씨가 아닌 당나라 성씨인 이씨로 회복되자 무씨 성을 버렸다. 천문령 전투는 12만명의 당나라, 거란 연합군을 3만여명의 고구려(발해), 말갈 연합군이 물리친 자랑스러운 전투였다. 대조영은 천문령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발해 건국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위협이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측천무후는 잡은 그대로 놓아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또다시 군사를 보내어 대조영군을 토벌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요서 지방의 거란과 해족이 돌궐에게 항복하여 요서가 돌궐의 땅이 된 것이다. 당나라는 돌궐을 통하지 않고 발해를 침공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으로 발해는 자유로운 나라가 된 것이다. 이에 대조영은 698년 길림성 돈화현 부근에 위치한 읍루의 동모산 성산자 산성에 도읍을 정했다. 이곳은 고구려의 옛땅으로 계부루라고 부르는 말 그대로의 고구려 옛땅이었다. 대조영이 698년에 세운 국호는 여러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와 책부원구에서는 떨칠 진 진국(振國)으로 되어 있고, 신당서, 삼국유사, 통전에서는 진동할 진 진국(震國)으로 되어 있다. 또 대조영은 사서에서는 고려별종, 속말말갈, 고려구장(옛 장군)으로 되어 있는데, 이 세가지를 모두 합친 것이 대조영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조영은 혈통은 말갈인이나, 그 선대에 이미 고구려로 들어와 고구려 멸망전에 이미 고구려화된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보는 것이 그의 정체성에 가까운 정의라고 할 수 있다. 713년에 발해로 국명을 변경하였는데 별칭으로 북국(北國), 발해말갈, 북적(北狄), 해동성국, 모쉬구르(거란말로 큰나라) 등이 있다. 측천무후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서기 698년 천문령에서 대조영군이 승전한 사실은 이미 말한바 있지만 같은해 698년에 소라한산에서 3-5만의 토번군과 30만명의 당나라 정예 금아군이 격돌했는데 공방이 가열해지고 지구전화 되자 측천무후는 당군 10만을 추가로 보강하였다. 이 전쟁은 698년 7월에서 699년 1월까지 무려 80여회의 교전을 벌였고 마침내 699년 3월 4일에 가르칭링이 매복, 화공, 암뢰 전술이 복합된 토번군의 분전으로 마침내 승리하였다. 당군의 전사자만 15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가르칭링은 평생 84회의 전투를 하였는데 모두 전승하였다. 658년 어린 시절 토욕혼을 정벌할때 백제를 정복한 소정방군을 물리친 전공을 세웠고, 당나라 고정때는 대비천 전투(청해성)에서 당나라 제일의 장수 설인귀를 포위 공격해서 5만의 당군을 살해하고 3만을 부상을 입히거나 생포했는데 설인귀를 포함한 모든 장수들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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