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0세 풍월주風月主 예원공禮元公(7) |
보스톤코리아 2021-05-03, 11:21:13 |
예원은 김염장의 강권과 어머니의 허락으로 첩을 들였다. 그의 첩 찰기察己는 염장공의 서녀인데, 그가 둔 17명의 첩 가운데서 가야파의 낭두 찰인察忍이 바친 딸의 소생이었다. 예원이 풍월주로 재임(632~634년)하고 있을 당시에는 찰인은 낭두였지만, 후일 24세 천광공天光公이 재임(643~647년)할 당시 찰인의 위세는 상선上仙(전임 풍월주)과 다를바 없었다. 그는 어느덧 가야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고, 당시 나이가 60이 넘었지만 강건한 체력을 과시하면서 화랑도의 대노두大老頭로 있었다. 또한 집안에서는 수 많은 처첩을 데리고 자식들이 백명이나 되었다. 출타시 따르는 낭도들의 기세 또한 위풍당당하였으며 풍월주 못지 않았다. 그의 적자인 찰두察斗와 찰석察石은 모두 도두都頭가 되어 위세를 뽐내면서 아버지를 닮아 축첩을 수십이나 하였다. 그러더니 결국 중상위급 간부인 낭두와 대낭두, 대두와 상두 등은 모두 그들 삼부자三父子의 아들과 사위에서 배출되었다. 풍월주와 부제와 전좌우대화랑前左右大花郞을 제외한 최고위 간부의 자리인 대노두大老頭, 대도두大都頭, 도두都頭 등은 찰인의 삼부자三父子가 도맡고 있었다(자세한 내용은 24세 풍월주 천광공편에서 다룰 것이다). 한편 예원이 맞이한 첩 찰기는 예의가 바르고 단정했다. 찰기는 시어머니 만룡과 정처 우야공주를 공경하며 잘 받들어 화목한 가정을 꾸몃기에 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김예원과 김선품의 파맥派脈과 그들의 의기투합, 서로 다른 파맥에도 불구하고 상호 존중하고 아꼈기에 선품을 부제로 임명한 내역을 비롯하여, 법흥왕의 증손자와 진흥왕의 외손자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인맥姻脈으로 인하여 파맥이 가야파가 된 김진주金眞珠, 그는 끝내 화랑의 수장인 풍월주가 되지 못한335) 그 내용이 화랑세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공의 부제 선품공善品公 또한 미실궁주의 딸인 보화寶華 공주의 소생이다. 보화는 난야와 어머니가 같고 우야와는 아버지가 같다. 그러므로 진평제가 예원공을 사랑함이 유달리 심했다. 공은 선품보다 2살이 많았다. 뜻과 취향이 서로 맞아 마침내 형제가 되었다. 은혜와 사랑함이 날로 두터워지자 문득 끌어들여 화제花弟로 삼고 거취를 같이 했다. 선품은 대원신통파인 까닭에 낭도 중에 간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정색을 하며 거절했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끌어들여 부제로 삼았다. 그 때 가야파인 진주공眞珠公이 오랫동안 좌방左方화랑으로 있었으나 풍월주가 되지 못했는데, 어떤 자가 그에게 물려줄 것을 권했다. 예원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진주는 나의 형이다. 어찌 형에게 동생에게 하는 것처럼 물려줄 수 있겠는가?” 했다. 진주는 이에 화랑에서 물러나 병부兵部에 들어갔다. 공과 선품은 더불어 낭정을 수행했는데, 3파를 균등하게 등용하여 중망衆望을 크게 만족시켰다. 선도仙道는 보종을 따르고 무도武道는 유신을 따랐다. 예원공은 풍월주에 3년간 있다가 선품공에게 물려주고 예부로 들어갔다가 조부調府로 옮겼다. 선덕대왕이 총애하여 내성사신으로 발탁하였다. 대왕이 붕하자 물러나 양진養眞을 했다.] 신라는 당시 백제의 잦은 침략으로 변방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642년(선덕여왕11년) 8월 백제의 장군 윤충이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앞서 대야성 성주 김품석(김춘추의 딸 고타소의 남편)은 부하 검일의 부인이 미색인지라 빼앗고 말았다. 이에 원한을 품고 있던 검일이 윤충의 군사가 진격해오자 보급창고에 불을 지르고 성문을 열었다. 그러니 김품석은 일전을 치루어 보지도 못하고 처자를 죽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춘추는 심한 충격에 빠져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옆으로 사람이 지나가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충격에서 깨어난 그는 대야성 함락에 대한 복수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는 곧 원병을 청하러 고구려로 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장왕과 실권자 연개소문은 진흥왕 때 잃은 죽령 이북 영토의 반환을 내세우며 그를 억류하였다. 그러자 김유신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출정하였고, 김춘추는 선도해의 도움으로 ‘귀국하여 왕에게 청하여 땅을 돌려주게 하겠다’ 는 거짓 약속을 하고 풀려났다. 그리고 김춘추는 647(진덕여왕 원년)년 왜에도 갔었는데 원병을 구하는데는 모두 실패했다. 그 다음 그의 선택은 당나라였다. 김춘추의 대당외교의 구체적인 내용은 18세 풍월주 춘추공조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화랑세기 20세 풍월주 예원공의 역할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648년 김춘추는 아들 법민을 비롯하여 문장을 잘하고 풍채가 좋은 사람들을 선발하였다. 또한 선화仙花(상선, 전임 풍월주) 3인과 승려僧侶 3인도 뽑았다. 당시 42세의 예원은 사양하였지만 김흠순의 강권으로 선화와 승려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김춘추의 대당 외교단에 합류하였다. 그들은 당나라 관리들에게 바칠 유화遊花 몇명도 뽑아서 종실의 여자들로 둔갑시켰다. 예원공은 색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데 하물며 골품을 속이느냐며 언짢아 하였지만 유화들은 종실의 여인으로 둔갑하여 일행과 합류하였다. 당항진을 떠난 김춘추 일행의 배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다. 사람들은 여자를 바다에 제물로 바치고 광풍을 잠재우려 하였다. 335) 김진주金眞珠는 9세 풍월주 비보랑과 덕명공주의 5남으로 태어났다. 비보랑의 부모는 비대전군과 실보이며, 비대전군의 부모는 법흥왕과 옥진이다. 그리고 진주의 어머니 덕명공주의 부모는 진흥왕과 월화공주인데, 월화는 가야국에서 왔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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