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19세 풍월주風月主 흠순공欽純公(7) |
보스톤코리아 2021-02-15, 11:50:50 |
김흠순의 부인 보단은 며느리들에 대하여 염려를 많이 했다. 김흠순은 정처 보단과 함께 아들 일곱을 두었고, 후처 이단과는 딸 셋 아들 둘을 두었다. 아들 아홉 중 셋째인 반굴만 사촌인 영광(김유신의 딸)과 결혼했고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김염장의 딸들과 결혼했다. 그래서 가산이 넉넉하지 못했던 김흠순은 김염장의 딸들이 나누어 가지고 시집 오는 재물로 가계를 꾸렸다. 당시 김염장은 도성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하지만 보단은 그 며느리들의 행실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염장도 미생 못지않게 수많은 첩들을 데리고 있었기에 부전여전으로 가풍을 어지럽게 할까봐 늘 염려했는데 보단의 예측은 현실로 나타났다. 화랑세기에는 나오는 그 장면은, [공은 재물에는 어두워 늘 염장공에게 구했다. 염장공은 웃으며 “네가 나를 곳간으로 삼는데 나의 아이를 기르지 않는다면 나는 손해이다” 했다. 공은 이에 여러 아이들에게 염장공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딸들이 염장공의 재산을 나누어 시집오게 했다. 보단은 “염장공은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니 그 딸을 맞으면 가풍이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했다. 공은 “색을 좋아하는 것은 성품이다. 나 또한 그대가 없었다면 곧 염형과 같았을 것이다. 내가 재물을 탐했다면 곧 집이 부유해져서 그대로 하여금 고생을 하지 않게 했을 것이니, 호색탐재 또한 할만하지 않는가?” 했다. 보단은 막을 수 없었다. 염장공의 딸들은 과연 행실이 없었다. 공 또한 심하게 책망하지 않았다. 공의 셋째 아들만이 홀로 염장공의 딸을 버리고 유신공의 딸 영광을 아내로 맞아 아들인 영윤을 낳았으니 그가 곧 반굴공이다. 부자가 마침내 전쟁에서 죽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을 것이다. 넷째 아들 원수元帥, 여섯째 아들 원선元宣은 모두 중시가 되었는데 보단의 소생이다. 아홉째 아들 원훈元訓 또한 중시였는데 곧 이단의 소생이다. 모두 공의 음덕이 이룬 것이다.] 여기서 아홉째 막내 아들 원훈의 후손을 살펴 보고자 한다. 화랑세기를 연구하지 않으면 도저히 풀 수 없는 신라 하대下代 첫 왕인 제37대 선덕왕 김양상, 그는 신라 역사 속에서 상당히 미스터리한 왕이다. 홀연히 나타나서 왕좌에 있다가 동해바다로 사라진 그런 인물과 같다(그는 죽기전 화장해서 동해에 뿌리라고 유언하였다). 우선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하여 김양상과 연결된 인물 몇명을 나열한다. 제36대 혜공왕 김건운金乾運, 제38대 원성왕 김경신金敬信, 김지정金志貞, 김주원金周元, 제33대 성덕왕 김융기金隆基, 추봉왕인 개성왕 김효방金孝芳 등이 주요 인물들이다. 먼저 ‘김지정의 난’ 을 보자. 혜공왕 16년(780년) 2월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인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견해는,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혜공왕이 사치와 방탕이 심하여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졌기에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왕과 왕비를 죽이니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 등이 난을 평정하면서 김지정을 처형한 뒤 김양상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다른 견해는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을 겨냥하여 김지정이 난을 일으켰으며 이 과정에서 혜공왕과 왕비 그리고 김지정 모두 죽고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열왕계로 왕통이 이어지지 않고 김양상이 왕위를 이엇다(찬탈했다?). 또한 김양상이 후손 없이 죽으니 무열왕계인 김주원과 김경신이 싸워서 김양상 일파인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다(원성왕). 결국 김주원은 하슬라(현 강원도 강릉) 로 피신했고, 후일 그의 차남 김헌창이 반란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삼국사기를 인용하면서 자세히 살펴 보면 “왕이 어려서 즉위해 장성했는데 성색聲色327) 에 음란하고 순류巡遊에 절도가 없어 강기綱紀328) 가 문란했으며, 재이災異가 자주 일어나 인심이 반칙하고 사직이 위태롭게 되어, 이찬 김지정이 모반을 해 무리를 거느리고 궁궐을 포위해 이를 범하였다. 그런데 4월에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이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주살하고 혜공왕과 그 후비까지도 난중에 시해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김지정은 거병하여 모반을 시도하였지만, 궁궐 내부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밖에서 오랫동안 대치를 하던중, 김양상과 김경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김지정의 반란군을 진압하며서 혜공왕과 왕비/후비들도 함께 시해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혜공왕과 왕비/후비들이 누구에게 시해 당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삼국유사에는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혜공왕 재위시에는 왕권은 힘을 잃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진골 귀족들의 모반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일길찬 대공大恭의 반란(767년), 대아찬 김융金融의 반란(770년), 이찬 김은거金隱居의 반란(775년), 그리고 780년에는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은 혜공왕 김건운金乾運에 대한 특이한 기록을 보기로 한다. 327) 음악과 여색 328) 법률이나 풍속의 기율, 사람이 지킬 도리와 기율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의견목록 [의견수 : 0] |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 |
|
프리미엄 광고
161 Harvard Avenue, Suite 4D, Allston, MA 02134
Tel. 617-254-4654 | Fax. 617-254-4210 | Email. [email protected]
Copyright(C) 2006-2018 by BostonKorea.com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and Managed by Loopiv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