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 장군 (4) |
보스톤코리아 2021-01-11, 12:52:54 |
군주가 어리석을때 생기는 일들?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은 AD 712년에 년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가난 퇴치를 포함한 10가지 치국 정치를 시작하였다. 승상 요숭, 송경, 한유, 장구령 등 명신들이 주도 하였는데 역사가들은 이를 "개원(開元)의 치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당태종 때의 방현령, 두여회의 "정관의 치적"에 비견할 만한 업적이었다. 한유는 당현종에게 잔소리를 많이 했는데 신하들이 왜 한유를 내치지 않느냐고 묻자, 그것은 "짐이 마르더라도 천하와 백성이 살찌면 아무 여한이 없다."라고 하며 잔소리하는 한유를 두둔하였다. 이처럼 지난 30년 동안 당현종은 훌륭한 군주였다. 그런데 그의 치적은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무혜비가 사망하자 정치에 실증을 내고 후궁이나 내시들과 어울리는 것이 잦아졌다. AD 736년에는 명재상 장구령을 해임하고 천하의 간신 이임보를 기용하는데 이를 "천보난치"라고 부른다. 중국 역사에서는 6명의 대표적인 간신이 있었는데 진시황때의 조고, 남송의 진회가 포함된다. 당나라에서는 이임보가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이임보라는 자가 워낙 권모술수에 능해서 그에게 딱 적합한 고사성어까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은 "입으로는 꿀같은 말을 하지만 뱃속에는 무서운 칼이 들어있다"는 말로 이임보에게 아주 적합한 말이다. 무혜비와 양귀비 이야기 무혜비는 자색이 뛰어난 후궁으로 당현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자신의 아들 이모(李瑁)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온갓 술수를 부리다가 황태자와 두명의 왕자를 죽게 만들었다. 그 후로 무혜비는 자신이 음해하여 죽게한 사람들의 망령이 나타나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3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당현종은 사랑하던 무혜비가 죽자 슬픔에 잠겨 지내고 있었는데, 무혜비의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부인 양옥환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화청지 온천으로 양옥환을 불러 결합하게 되었다. 수왕 이모는 두눈을 빤히 뜨고 자신의 아내를 아버지가 데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만 하였다. 이때 당현종은 57세였고 양옥환은 22세였다. 당현종은 30명의 아들이 있었고 29명의 딸이 있었으며 또 다른 부인을 마지하게 되는데 양귀비 본인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양귀비의 세 언니도 한국, 괵국, 진국부인에 봉해 졌는데 양귀비를 위해 바느질을 하는 사람이 7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양귀비는 여지라고 부르는 남방과일을 즐겨 먹었는데, 시들지 않은 여지를 먹게 하려고 역참으로 밤새 달려 장안에 도착할때도 색깔과 맛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록산, 사사명의 난 (안사의 난) 안록산은 이란계 소그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돌궐사람이었다. 당현종이 안록산을 너무 편애하여 평로 절도사와 범양, 하동 절도사를 겸하게 되자 당나라 전체 병력의 1/3이 안록산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에 안록산이 당현종에게 추천하여 벼슬을 받게 한 사람이 500명이었고 장군 직함을 받게 한 사람이 2천명으로 이는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당현종은 안록산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것이라고 했지만 반란 15일만에 비로소 이를 믿게 되었다. 안서 도호부 봉상청 절도사를 불러 계책을 물었지만 병력이 없었다. 낙양 부근의 부고를 열고 비단을 나누어 10일만에 6만의 병사를 모집했는데 대부분 군사경험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에 비해 안록산 군은 15만명의 대군으로 철기병을 앞세우고 있어 봉상청 군이 상동문, 도정역 싸움에서 계속 패하여 섬도로 퇴각하였다. 이에 당현종은 현종의 아들 이완을 원수로 삼아 대장군 고선지가 그를 돕도록 하여 5만의 군사로 장안을 출발하여 봉상청과 합류하도록 했는데, 문제는 환관 변영성이 감군, 즉 감독관이 된 것이다. 원래 변영성은 고선지와 여러번 전투에 참여해 왔는데 고선지를 도와주는 것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인물이었다. 바로 이 변영성으로 인해 고선지는 물론이고 봉상청까지 목숨을 잃게 된다. 봉상청이 고선지에게 진언하기를 "우리가 연일 혈전을 벌여도 안록산군의 칼날이 강해 우리가 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키기 어려운 섬군을 버리고 지키기 쉬운 동관을 지키는 것이 상책입니다. 섬주에는 태원창이라는 군량창고가 있는데 안록산 군의 기세가 강성해 창고를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선지는 봉상청과 상의해서 군사들에게 가져갈 수 있는 만큼의 군량을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불태웠다. 이에 고선지는 동관에 이르러 완벽하게 지키고 대비하니 안록산 군이 뒤이어 동관에 이르렀지만 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여러달을 허송하게 되었다. 동관은 장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인데 한명의 군사가 이곳을 지키면 만명의 군사로도 돌파할 수 없는 요새로 안록산 군의 공세를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선지의 전략은 동관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곽자의 장군의 원병이 도착할 때를 기다려 협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당현종이 파견한 변영성이 고선지를 모함하고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변영성은 고선지가 섬주의 식량을 도둑질했고 섬주에서 후퇴함으로 넓은 땅을 빼앗겼다고 모함하였다. 변영성과 당현종은 동관을 차지하게 되어 전략적으로 엄청난 이득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전투중에 지휘관을 바꾸는 것은 금기 사항인데, 더구나 고선지를 참수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선지 휘하의 군사들이 고선지가 억울하다고 큰소리로 외쳤는데 그 소리가 사방을 진동하였다. 당나라를 위해 싸운 고선지와 봉상청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갔다. 중국역사에서 원통하게 죽은 10명의 장군들을 원통하게 죽었다고 해서 원장(寃將)이라고 부른다. 한고조 유방에게 죽임을 당한 한신, 남송의 악비를 원장으로 부르는데 고선지는 고구려 사람으로 중국인이 아닌 유일한 원장이다. 고선지가 떠나간 뒤에 동관은 가서한 장군이 지키게 되었는데 승상 양국충이 나가서 싸우라고 협박해서 결국 나가 싸우다가 안록산에게 잡혀서 동관을 빼앗긴다. 우리에게 알려진 변영성은 그 즉시 안록산에게 투항을 해버렸다. 나중에 안록산이 죽었을때 변영성은 당나라 편으로 다시 돌아 오지만 당현종은 그를 참살해 버렸다. 동관을 안록산에게 빼앗기게 되자 당현종은 사천지방으로 피난을 가려고 장안 근처의 마외파에 이르렀을때 호위하던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양귀비와 그 일족을 처형하지 않으면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뒤에서 안록산의 군대가 쫒아오는 급박한 상황에서 당태종은 양국충을 비롯한 일족을 병사들에게 내주었다. 양귀비는 마외파 부근의 불당앞 대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다. 그뒤로 사람들은 양귀비 무덤의 흙을 귀비분이라고 하여 너도나도 파가기 시작하여 봉분이 없어질 지경이 되었다. 나중에 청나라때에는 무덤에 벽돌을 쌓아 이를 방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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