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19세 풍월주風月主 흠순공欽純公(2) |
보스톤코리아 2021-01-11, 12:45:48 |
화랑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세 흠순공欽純公은 유신의 동생이다. 처음에 염장공의 부제가 되었는데 유신공의 명으로 춘추공에게 양보했다. 이 때에 이르러 풍월주의 위에 이르렀다. 그 해에 공의 아버지 서현공과 형 유신이 낭비娘臂를 쳐서 큰 공을 세웠다. 공은 분연히 말하기를 “나로 하여 이 같은 빈 그릇만 지키라고 하니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 나도 또한 지금부터 나갈 것이다” 했다. 대개 그때 사람들이 공세우기를 좋아하고 선도仙道를 탐구하지 않았는데, 공 또한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로써 흠순공의 재위 4년 동안 한결같이 낭정郎政을 돌보지 않고 낭도를 거느리고 지방에 머물렀다. 부제인 예원공禮元公이 낭정을 대행했다. 공은 이에 예원공에게 물려주며 “실제로 낭정을 행하는 사람이 풍월주가 되어야 한다” 했다. 공은 성품이 활달했고, 청탁淸濁에 구애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유신공을 두려워하고 공경했으나 공은 홀로 그러지 않고 “어리석은 형이 어찌 두려운가?” 했다. 그러나 유신공의 우애는 지극히 돈독하여 공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랑했다.] 김흠순은 598년생으로 김유신보다 3살이나 어렸지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형을 어리석다고 떠벌리며 버릇없이 굴었다. 단 6자로 기록된 화랑세기의 그 내용으로 인하여 그의 다른 면모를 보게한다(愚兄何足畏也우형하족외야 - 어리석은 형이 어찌 두려운가?). 그러나 그는 참으로 용감한 화랑이었고 훌륭한 신라의 명장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할아버지 김무력이 가졌던 무장의 혈통이 흐르고 있었고, 12세 풍월주 김보리에 이어 풍월주가 될뻔했다가 사랑하는 연인 만명부인과325) ‘도주’ 한 아버지 김서현이 못이룬 화랑의 수장인 풍월주에도 올랐다. 그리고 그의 아들 반굴도 용감한 화랑으로 황산벌 전투에서 화랑 관창과 함께 단기필마로 적진에 뛰어들어 수 많은 적의 목을 베고 장렬히 전사하여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혀 백제군을 치면서 사비성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반굴의 아들이며 김흠순의 손자인 김영윤 역시 가통家統을 이어 받아 황산벌 전투 등 수 많은 전투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684년(신문왕 4년) 금마저金馬渚(현 전북 익산)에 있던 보덕성報德城326)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전사하였다. 보덕성은 보덕국이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신라내의 고구려 유민들의 자치 지역이었다. 그곳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김영윤은 이를 평정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하지만 보덕성의 유민들은 예상보다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이에 다른 장수들은 궁지에 몰린 적은 쫓는 법이 아니며,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급습하는 전술이 효과적이라며 일단 물러나자고 권유했지만, 김영윤은 “장수는 전투에 임해 용맹해야 하고 진격만이 있을 뿐 후퇴는 있을 수 없다” 는 임전무퇴의 화랑도 정신으로, 다른 부대들은 철수하고 있는데도 홀로 부하들을 이끌고 싸우다가 끝내 거기서 전사하였다. 그는 아마도 660년 아버지 반굴이 황산벌 전투에서 영예롭게 전사하여 가문을 빛내 것과 당숙(외삼촌이기도 하다) 김원술(김유신의 둘째 아들이다)이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가문에서 쫒겨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이라며 반굴과 영윤의 충절과 의열을 기렸다고 하며, 현재도 그들은 사군이충과 임전무퇴의 표상으로 받들어 지고 있다. 한편 668년(문무왕 8년)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킨 후 신라는 당나라가 제배하고 있던 백제의 옛 땅으로 세력을 넓혔다. 이에 당나라는 말갈군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 때가 672년이었다. 김유신의 아들 원술은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그러나 당과 말갈의 연합군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그래도 원술은 앞서 장렬히 전사한 장수들의 뒤를 이을 각오로 임전하려 하였지만, 부관 담릉淡凌이 만일 죽더라도 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살아서 후일을 도모함만 못하다는 이유로 만류하여 전쟁에서 이기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아버지 김유신은 왕명을 어기고 가문의 명예를 저버렸다며 그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문무왕은 원술을 용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은둔하였다. 다음해673년 김유신이 죽은 후 어머니 지소부인을 만나려고 본가를 찾았지만 지소도 아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자 원술은 부하 담릉의 말을 듣고 판단을 잘못했다며 탄식하면서 태백산에 은둔하였다. 675년 당의 설인귀가 당과 거란, 말갈의 연합군을 지휘하여 매소천성買蘇川城(현 경기도 양주 또는 연천)을 공격하여 왔을때 3년전의 치욕을 씻겠다며 출정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장수로서의 명예는 회복했지만 부모에게 받아들려지지 않았다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여생을 보냈다. 특히 아버지 김유신과 삼촌 김흠순 그리고 김인문(김춘추의 차남이자 원술과는 내외종이다) 이 문무왕으로 부터 ‘나라의 3보’라는 극찬을 받고 있었으니 매소천성 전투의 승리로 치욕은 씻었지만 그의 자존감을 채우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325) 만명의 어머니는 만호태후로 진평왕의 생모이다. 즉 만명은 진평왕의 이부동모 누이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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