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16세 풍월주風月主 보종공寶宗公(1) |
보스톤코리아 2020-08-03, 11:00:22 |
579년 늦 여름 어느날, 졸지에 왕이 된 어린 진평왕이 나름 정사政事를 보고 있는데 새주璽主 미실이 갑자기 그를 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가 정사情事를 치르려고 했다. 그러나 어린 진평왕은 미실과 합궁을 하지 못했다.304) 다시 미실은 늘 곁에서 정무를 보좌하고 호위를 총책했던 설원랑을 데리고 들어가 대낮에 색사를 하였다. 그 결과 김씨로 태어날뻔 했던 보종寶宗은 설씨로 태어났다(580년). 미실은 막내아들 보종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보종은 외모 뿐만 아니라 재능도 아버지 설원랑을 꼭 닮아 향가鄕歌와 청유淸遊를 즐겼다. 그래서 그는 화랑에 입문한 후에는 설원이 이끌던 운상인雲上人파에 소속되어 기량을 키웠고, 우삼부(현묘玄妙, 악사樂事, 예사藝事를 맡았던 부서)를 거쳐서 14세 풍월주 호림공 밑에서 부제를 지냈다. 호림과 보종이 서로 아끼고 나누는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았으며, 심지어 보종은 여자가 되어 호림을 섬기지 못함을 한스러워 했다고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보종은 전통적으로 부제가 이엇던 15세 풍월주의 위를 김유신에게 양보하였다가, 대원신통들의 지원으로 김유신을 이어 16세 풍월주가 되었다. 한편 사도와 미실 일파는 579년 8월24일 진지왕을 황음무도한 왕이라며 폐위시키고 나서 어린 백정(진평왕)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사도태후의 섭정이 시작되었다(진평왕의 조모 사도는 584년까지 섭정을 했다). 아울러 새주 미실은 또 다른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보명과 함께 좌우후左右后로 진평왕을 색도色道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늦 여름날, 정사당政事堂(원문에는 정당政堂)에서 집무를 보던 미실은 깜빡 잠이 들었다. 달콤한 오수와 함께 백양白羊 한 마리가 그녀의 가슴으로 살포시 들어 왔다. 꿈이었다. 길몽임을 알고 어린 진평왕의 손을 이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왕은 아직 어린 아이였다. 화랑세기에 보면, [16세 보종공은 또한 미실궁주의 사자私子이다. 홍제鴻濟8년에305) 사도태후가 친정親政을 했다. 미실궁주가 새주璽主가 되어 정당政堂에서 문서들을 보다가 낮 꿈을 꾸었는데 백양이 가슴으로 들어 왔다. 그것이 길한 꿈임을 알고 급히 제帝를 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 갔다. 제는 나이가 아직 어려서 궁주의 기분에 따라 주지 못했다. 이에 금하衿荷 설원랑薛原郞에게 다시 들어가 모시도록 하여 (보종)공을 낳았다. 공은 자라면서 모습이 금하와 같았다. 그러므로 미실궁주가 금하에게 내려주고 아들을 삼게 했다. 궁주는 공이 막내아들이 되기 때문에 매우 사랑했다. 하종공 또한 공을 도탑게 사랑했다. 보종공은 처음에는 제帝를 아버지라고 했다. 자라자 금하에게 돌아갔다. 제帝는 (보종공을 마복자로) 생각하여 상사賞賜가 심히 많았다.]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보면, 사도태후는 진흥왕의 비妃로서 부모는 박영실과 옥진이다. 사도는 진흥왕과 장남 동륜, 차남 금륜(사륜), 삼남 구륜을 낳았다. 장남 동륜은 태자의 위位에 있을때 아버지의 후궁인 보명궁주의 치맛폭을 풀려고 월담을 했다가 개에게 물려서 죽었다(572년). 그는 부인 만호와의 사이에서 아들 백정, 백반, 국반을 두었다. 금륜은 아버지 진흥왕을 이어 제25대 진지왕이 되었다가 폐위되었다. 구륜은 삼국유사에 견훤의 고조부로 나오는데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본다. 새주 미실은 아마도 왕의 옥새를 관장했을 것이다. 미실은 세종과 결혼하였는데, 진흥왕의 후궁이 되었다. 하종은 미실의 아들로 세종과 낳았다. 세종은 진흥왕의 이부동모 동생인데 부모는 태종과 지소태후이다. 설원랑은 7세 풍월주을 역임하였으며 부모는 설성과 금진이다. 금진은 옥진의 동생이며, 처음에 법흥왕의 후궁으로 있다가 후사가 없어서 출궁 되었으며, 이때 그녀를 사모한 구리지와 결혼하였다. 그들은 아들 토함과 5세 풍월주 사다함 그리고 딸 새달을 낳았다. 구리지가 548년 독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금진은 구리지의 용양신이었던 설성과 살면서 설원랑을 낳았다. 인용문에서의 제帝는 진평왕을 말한다. 마복자란 배를 문지른다는 뜻인데 임신한 여인을 왕이 관계하여 태어난 아들을 왕의 마복자라고 하였다. 그들은 왕자나 전군은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다. 304)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출생연도가 없는데 화랑세기에는 567년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576년 제24대 진흥왕이 죽자, 왕비 사도와 새주 미실은 진흥왕의 장손인 백정(후일 진평왕, 진흥왕의 장자 동륜의 아들, 동륜은 572년에 죽었다) 대신 차자이며 당시 태자로 있던 금륜을 차기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들의 합의에는 미실의 왕후 책봉이 있었다. 하지만 왕좌에 오른 진지왕은 미실을 왕후로 들이지도 않았으며, 정사政事는 돌보지 않고 정사情事에만 몰두했다. 결국 579년 8월, 사도태후(진지왕의 생모)와 사도의 오라비 노리부의 세력, 그리고 미실과 미실의 남편인 6세 풍월주 세종이 이끌던 화랑도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305) 홍제는 572년에서 584년 정월까지 12년1개월 동안 사용한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대의 연호이다. 홍제8년은 579년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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