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15세 풍월주風月主 유신공庾信公(9) |
보스톤코리아 2020-07-06, 10:43:45 |
김춘추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를 둘째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화랑도의 부제가 되었다. 그러나 춘추는 차기 풍월주의 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에 앞서 호림공이 14세 풍월주에 재임시 보종공이 부제였는데 보종이 15세 풍월주에 오르지 못하고, 만호태후의 후광으로 김유신이 15세 풍월주에 올랐다. 그러자 화랑도 내부의 파벌 중에서 보종이 속한 대원신통파의 낭도들이 불평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낭도들의 화합과 부제의 차기 풍월주 계승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하여 일단 16세 풍월주의 위는 보종공에게로 이어졌다. 이렇게 되자 더욱 많은 낭도들이 유신의 넓은 도량을 높이 인정하여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며 충심을 다하여 따랐다. 결국 삼국통일의 기운은 이미 여기서 부터 솟아나고 있었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김유신이 이룩한 업적과 공덕은 이미 모두 ‘사책史冊’에 있으니 여기서는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가 가야의 우두머리이며 신국 신라의 영웅이라고 기술하였다. 화랑세기에는 왕이 아니면서도 (대)영웅, (대)영걸로 묘사되는 인물들이 여러명 있다. 이들은 이사부로도 잘 알려진 태종, 8세 풍월주를 역임한 문노, 15세 풍월주를 역임한 김유신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태종과 문노는 사후에 신궁에 신神으로 봉안되었음도 화랑세기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김유신이 신궁에 모셔져 있는지는 화랑세기를 통해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거칠부(황종)나 문노의 사례로 보면 유신 역시 신궁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미 화랑세기를 집필할 당시 김유신에 관한 기록이 많았다고 하였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열전 세권을 김유신에게 할애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도 그를 기록한 많은 사서가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박제상의 부인은 실성왕의 딸인 치술공주이다. 그들은 딸 청아를 비롯하여 아기阿奇, 아영阿榮, 아경阿慶을 두었고, 아들은 효원과 백결선생으로 유명한 문량을 두었다. 그리고 박제상은 왜에서 미사흔(미해)을 구하여 귀국시킨 후 돌아오지 못하고 화형을 당했다. 박제상과 치술의 딸 청아는 미사흔의 부인이 되었다. 그들은 아들 백흔과 딸 통리와 수리를 두었다. 통리는 금관가야의 질지왕의 왕비가 되었고, 수리는 보신(미사흔의 아들)과 황아의 아들인 보기의 부인이 되었다. 통리는 질지왕의 왕비였지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오라버니 백흔의 딸 하희를 데려다가 후궁으로 삼았다. 또한 아들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통리가 아들 선통善通을 낳았다. 선통은 태자에 책봉되었다. 선통이 사냥을 하다가 비를 만나 김상金相(가야 좌지왕의 외손자)의 집에 피했다가, 그의 딸 방원邦媛의 유혹에 상통하고 달이 차서 딸을 낳았다. 이에 왕후 통리가 알고나서 방원을 데려다 태자비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후 통리와 태자 선통이 모두 죽었다. 그러자 질지왕이 며느리인 방원을 왕후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겸지鉗知가 태어났다(겸지가 태어난 후에 왕비로 책봉했다). 이 겸지가 김유신의 고조부이다. 한편 박제상이 왜에서 죽고 귀국하지 못하자 눌지왕이 제상의 부인 치술을 위로하고자 후궁으로 삼았다. 그들 사이에서 황아가 태어났다. 황아는 미해의 아들 보신의 부인이 되었다. 황아가 보신과 결혼하였을 때 보신은 어린 아이었다. 다만 눌지왕은 동생 미사흔의 청으로 그들은 혼인시켰다. 결혼 후에도 황아는 왕의 총신과 사통하여 벌지와 덕지 두 아들을 두었다. 492년 덕지의 딸 계황桂凰이 납수納水(겸지왕의 조카)와 혼인하였다. 계황은 당시 최고의 미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미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겸지왕 또한 신라의 여인을 후后로 원했지만 어머니 방원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겸지의 다섯 형제는 모두 신라 여인들과 혼인하였다. 화랑세기에 기록된 김유신의 세계世系를 보면, [아버지는 서현 각간이고 할아버지는 무력 각간이고 증조부는 구충대왕이며 고조는 겸지대왕이다. 겸지는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나라의 골품이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고, 나라안에서 우리나라 조정에 부응했다. 겸지왕 원년 왕의 조카 납수공이 우리 덕지공德知公의 딸 계황을 아내로 맞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왕 또한 우리나라 여자를 원했는데 왕의 어머니 방원이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왕의 아버지 질지대왕이 영명하여 선정을 베풀어 금관金官이 잘 다스려졌다. 질지는 백흔공의 손아래 누이인 통리를 왕후로 삼았다. 곧 미해공의 딸이다. 그 어머니는 제상공의 장녀인 청아이다. 서로 매우 사랑했는데 일찍 아들이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겼다. 통리는 이에 백흔공의 딸인 하희를 데려다 첩으로 삼았는데, 또한 딸을 낳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 얼마 안 있어 통리가 아들 선통을 낳았다. 질지가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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