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고의 횡설수설 14 ] 환지통(幻指痛)에 대하여 |
보스톤코리아 2020-05-25, 11:30:41 |
재능이 없음을 깨닫자 나는 진즉에 문학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했다. 그렇지만 매년 정초가 되면 여러 신문에 실린 신춘문예를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환지통>이란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은 것은 아마도 20여 년 전이었던 것 같다. 문학 지망생에서 문학 애호가로 전향한지 한참 후였지만 여전히 신춘문예를 쫓아다닐 무렵이었다. 줄거리는 대략 이랬다. 한 남자가 팔의 통증이 너무 심해 고통스러워하다가 잠을 깨어보면 사실은 팔이 없었다. 한국동란 중에 팔을 잃은 후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왼쪽 팔’이 아파 잠을 설친다는 내용.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소재가 독특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관심을 끈 것은 존재하지 않는 팔이 과연 아플 수 있는가 하는 과학적, 혹은 생물학적 사실에 관한 것이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했고, 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튼 재미있었지만 아리까리했다. 시간이 흘렀고 그 독특한 소재를 다룬 신춘문예 당선작에 대한 기억도 무뎌져갔다. 십여 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놀라운 사실에 접하게 되었다. 샌디에고 의과대학의 라마찬드란 교수가 환지통의 비밀을 밝혀냈다는 것이었다. 환지통(幻指痛)은 말 그대로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사지에 통증을 느끼는 병이다. 영어 phantom limbs pain에 정확히 일치하는 한자번역이다. 그가 보여준 실험장면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한쪽 팔이 없는 환자에게 눈을 감게 한 후, 라마찬드란이 면봉으로 그의 얼굴을 건드리면서 어디를 건드렸는지 묻는다. 눈을 감은 환자는 뺨이라고 대답하고는 면봉이 얼굴의 다른 곳을 건드리자 왼팔이라고 대답한다. 왼팔이 없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환자는 자신이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놀란다. 라마찬드란이 밝힌 바에 의하면, 환지통의 원인은 대략 이렇다. 뇌에는 팔다리와 같은 몸의 각 기관이 마치 지도처럼 새겨져 있고 몸의 각 기관과 뇌가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신체의 특정 기관이 사라지면 뇌에서는 끊임없이 해당기관으로 신호를 보내지만 반대로 해당 기관에서 뇌로 보내지는 신호가 없게 되고, 그 결과 자극의 입력을 기다리는 뇌가 그만 이웃한 기관에서 들어오는 신호를 마치 해당 기관에서 보내지는 자극으로 착각을 해서 환지통과 같은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실험에 등장한 환자의 경우, 뺨에 가해진 자극을 마치 왼팔에서 들어온 자극으로 뇌가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사지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 게다가 그 존재하지 않는 사지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 환지통은 인간의 뇌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착각의 결과로 인간의 뇌가 왜곡된 기억이나 심지어 거짓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라마찬드란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다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경우 역시 뇌의 착각으로 인한 현상이라고 해석한다. 환지통이란 동일한 현상에 대한 한 무명작가의 문학적 접근과 서양식의 의학적 접근은 나에게 너무나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니 강렬한 인상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자각이 우선 그중 하나이다. 전에 나는 이런 말을 자주했었다. 분명히, 확실히, 기억해,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따위와 같은 말들 말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런 말을 쉽게 쓸 수 없다. 어쩌면 내가 나의 뇌에 속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 뇌의 착각으로 거짓기억을 가질 수도 있고 기억이 부분적으로 왜곡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환지통의 실상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나이 들면서 더 너그러워지고 더 포용적이 되긴 한다. 그럴 수도 있지, 내가 틀릴 수도 있어, 라고 인정한다. 환지통은 젊은 날의 확신을 버리고 사물에 대해 유보적이 되도록, 오류를 인정할 여지를 가지도록 만들어준다. 모든 것에 대해 단호한 태도와 입장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우리로 나로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주고, 그리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크신 하나님에게로 의탁하게 해준다. 올댓보스톤 교육컨설턴트, [email protected]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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