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13세 풍월주風月主 용춘공龍春公(13) |
보스톤코리아 2020-02-24, 12:03:28 |
용춘은 아버지 진지왕이 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폐위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색을 좋아하지 않고 왕에게 아첨을 하고 싶지 않아 선덕여왕을 모시는 황서(왕의 남편)의 위位에서 물러나기를 여러번 청했다고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선덕은 을제乙祭에게 정사를 맡기고 용춘을 천명에게로 돌려 보냈다. 삼국사기(권5)에 보면 선덕왕이 원년(632년) 2월에 을제를 ‘총지국정摠持國政’ 토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총지국정은 모든 권한을 가지고 국정을 다스리라는 뜻이다. 즉 화랑세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용춘이 황서에 물러난 때가 선덕여왕이 즉위한 해 2월로 사료된다. 그런데 아버지 진지왕이 당한 폐위를 슬퍼했고 색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여러차례 기록된 것과는 달리 그는 정처 천명공주와 합하기 전에도 왕명으로 호명궁주와도 살았다. 그리고 후처로 대씨大氏, 매생梅生, 홍주紅珠 등이 있었다. 대씨는 그의 심복 부하 대남보의 딸이고, 매생은 10세 풍월주 미생의 딸이며, 홍주는 9세 풍월주 비보랑의 딸이다. 홍주의 어머니는 덕명공주인데, 덕명의 부모는 진흥왕과 월화공주이다. 월화는 가야에서 온 공주였다. 비보랑은 처음에 세진과 결혼하여 세호랑, 세미(딸), 세신를 두었는데 장남 세호랑과 함께 603년 진평왕이 친정한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비보랑의 딸 홍주는 첫 부인 세진이 죽은 후 결혼한 덕명공주의 딸이다. 비보랑과 덕명은 5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들은 붕부, 보부, 석부, 보주, 진주이고, 딸들은 홍주, 녹주, 명주이다. 다음은 용춘공의 자녀들을 보면, 그는 형 용수와 천명이 낳은 김춘추를 아들로 삼았다. 부인 천명과는 딸 다섯을 낳았지만 적자嫡子는 없었다. 그의 서자는 다섯인데 대씨가 용산龍山과 용석龍石을 낳았고, 매생은 용귀龍貴를, 홍주는 용주龍珠와 용릉龍凌을 낳았다. 그리고 서녀들은 자그만치 18명이나 되었다. 이 용춘의 딸 중에 용태龍泰(용산의 누이)가 오라버니(혈통으로는 사촌) 춘추를 섬겨 김인태金仁泰 각간을 낳았다. 김인태는 668년9월21일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켜 보장왕이 항복하는 장면에도 등장한다(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8년). 삼국사기에 나오는 그 장면을 인용해보면, “9월21일 당나라 군사와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淵男産 등을 보내 영공英公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福男, 덕남德男, 대신大臣 등 20만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갔고, 인태仁泰, 의복義福, 수세藪世, 천광天光, 흥원興元 등도 좇아 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漢城을 출발하여 평양에 이르러 힐차양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연남산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 아들이고, 영공은 당나라의 장수 이세적, 또는 이적288) 이다. 보장왕의 장남 복남은 666년에 당고종이 국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하여 태산에서 거행한 ‘봉선의식封禪儀式’ 에 고구려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 즉 문무왕 김법민의 동생이다. 당시 신라의 유능한 장군으로 외교가로 그 임무를 수행했다. 651년(진덕여왕 5년) 에 당나라에 가서 숙위를 했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으로 장산성을 쌓았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서 나당연합군을 조직하는데 일조하였고, 660년(태종무열왕7년)에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668년(문무왕8년)에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는 다시 당에 들어가 살다가 694년에 병사하였다. 그리고 인태는 용춘과 대씨의 딸 용태가 김춘추와 낳은 김인태이다. 그는 660년 백제 정벌에 참전하였고, 군사 7천으로 사비성을 지키는 책임자이기도 했다. 668년 고구려을 멸망시키고, 이적(이세적, 영공)이 보장왕과 왕자들을 데리고 당으로 갈때 수행하였다. 그리고 천광은 24세 풍월주로 그는 진흥왕의 증손자이자 외증손자이다. 그의 조부 구륜은 부모가 진흥왕과 사도왕후이고, 외조부 천주의 부모는 진흥왕과 월화공주이다(천주와 덕명은 남매간이다). 다음으로 흥원 역시 화랑이었는데 ‘흠돌의 난’ 때 흠돌과 주동이 되어 진공(26세 풍월주), 흠언(31세 풍월주, 흠돌의 아들), 신공(32세 풍월주, 진공의 아들) 함께 난을 일으켰는데, 그 때가 문무왕을 이어 신문왕이 즉위한 해인 681년이었다. 288) 이세적(李世勣 594 ~ 669년), 그는 당나라 장수로 본명은 서세적徐世勣이었는데, 당고조 이연으로 부터 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 나중에 이세민이 황제로 즉위하자 황제의 휘의 ‘세’ 자 피하여 이적李勣이라고 했다. 손자 이경업이 측천무후 타도와 중종의 복위를 외치며 양주에서 거병했지만 실패하였다. 그 결과 일족이 주살되었고 이적 또한 부관참시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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