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보스톤 첫 이민자 신고희 “행운 50넘어 갑자기 찾아왔다” |
<특별 기획> 보스톤을 움직였던 사람들 1 - 보스톤 북쪽 첫 한인 이민자 신고희 선생 가슴 아픈 실패들이 쌓여 어느 순간 성공의 밑거름 적극적으로 한인들 도운 자연스런 리더십도 한 몫 |
보스톤코리아 2020-02-20, 20:24:57 |
(보스톤 = 보스톤코리아) 장명술 기자 = 사람들은 그를 “선생’이라고 호칭했다. 북부 보스톤 지역 첫번째 한인 이민자 신고희씨(85)를 이르는 말이다. 70년대 초 보스톤 북쪽 지역으로 이민 온 사람들 중에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신 선생은 자신의 손으로 이력서를 수백장을 썼다고 말했다. 이민 온 한인들의 직장을 잡아주기 위해서다. 자신을 챙기는 것 이상으로 주위 한인을 도왔다. 그의 자연스런 리더십이 그의 호칭을 “선생”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선생은 북부보스톤 교회가 생기기 전까지 “내가 다했어”라고 스스럼 없이 말했다. 안병학 전 한인회장도 “자신의 첫 직장을 잡아주고 영어 공부를 하도록 도움을 주신 분”이라고 그의 역할을 인정했다. 2월 18일 눈비가 섞여 내리는 오후 앤도버에 소재한 그래스필드(Grass Field) 레스토랑에서 그를 만났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구, 세월의 풍상이 느껴지지만 여전히 꼿꼿한 그다. 15년 전 한국으로 귀국해 생활했던 그가 옛날 이야기를 하며 감회에 젖었다. “영어를 못하니까 점심 때 샌드위치 파는 트럭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먹고 싶은 거 하나도 못 먹어 봤어. 앞에 사람 거 달라 그랬다.” 말을 하고 싶고, 먹고 싶어도 그 마음을 주머니 한켠에 넣어 두어야 했던 초기 이민자의 애환이다. 단지 언어만 장벽이 아니었다. 가족을 부양하는 그에게 단 1센트도 귀한 돈이었다. “콜라 하나에 10전… 콜라를 못먹겠어. 마치 피를 마시는 것 같았다”는 그의 말이다. 이민 후 그의 두번째 직장인 로렌스 밀(Lawrence Mill)에서 받은 급여는 시간당 $2.30이었으니 그만큼 소중했다. 신 선생에 따르면 로렌스밀은 당시 매리맥 강변(Marrimack River)에 위치했던 “세계에서 가장 큰 인조모직 공장”이었다. 그의 삶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 교통고등학교(철도고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11년간 철도 공무원(4급)으로 일했던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행을 선택했다. 당시 미국은 모두가 꿈꾸었지만 미국행은 쉽지 않았던 시대였다. 태권도를 했었던 그는 태권도를 통해 이민이 가능했다고 밝혔다. 1969년 12월 31일 신고희씨(85)는 보스톤에 도착했다. 손에 35불이 전부였다. 그러나 부인과 자녀 3명이 모두 한국에 있었기에 2일만에 “취직했다”며 35불은 다시 돌려 보냈다. 첫번째 직장은 신발 박스를 만드는 회사였다. 엔지니어라고 말해서 취직했는데 기계를 고치라며 두꺼운 영어책 두권을 주었다. 집에 와서 봤더니 전부 영어라 하나도 알지 못했다. 결국 기계가 고장 나도 고치지 못하자 2일만에 해고를 당했다. “한국은 못하면 가르쳐 쓰는데 미국은 바로 해고했다”며 그 때의 황망함을 전했다. 속은 쓰리지만 어이가 없어서 웃었더니 매니저는 그가 못 알아들은 줄 알고 “Tomorrow, you don’t come. So why you smile?”이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웃을 수 밖에 없었지만 속으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내와 3남매가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바람은 찬데 매주 한국의 가족에 돈을 부쳐야 했다. 처음 맞는 보스톤의 1월이었다. 노동도 기술이다 아픈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삶의 밑천이 됐다. 2일만에 쫓겨나자 신문 광고를 보고 로렌스(Lawrence, MA)에 위치한 로렌스밀에 취직했다. 섬유 공장으로 인해 세계 각지의 이민자가 몰려들었던 로렌스였지만 70년 초 그 지역 한인은 덩그라니 그 혼자였다. 신 선생은 로렌스밀에서 7개월 동안 노동을 했다. 그는 그 노동이 “구르마를 끄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인조 섬유를 박스에 넣은 것의 무게가 79파운에서 180파운드 정도였다. 이 박스 6개를 수레에 실어서 옮기는 일이었다. 6개를 수레에 실으려면 3층으로 쌓아야 했고 큰 문제는 그 무거운 박스를 3층에 들어 올리는 일이었다. 또 이 수레에는 브레이크가 없어 멈추기가 여간해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익숙해지면서 노동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일을 잘하는 미국 포맨(Foreman)들을 보고 배웠다. 무거운 것도 올리고 하다 보니 힘도 덜 들어갔다. 그러나 7개월 이 노동으로 인해 20파운드의 살이 빠졌다. 신씨는 “해고를 당해봤기 때문에 그 어려운 일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며 그는 당시 앤도버에서 미국인들이 운영하던 태권도장에서 사범들의 실력이 형편없는 것을 알게 됐다. 단원 중의 한사람의 도움을 받아 도장을 차렸다. 어느날, 북부지역에 2번째로 이민해왔던 박기식씨와 인연이 있는 이비인후과의 김청하 박사의 초대로 서쪽 피치버그(Fitchburg)를 방문했다. 그곳에 도장이 한곳도 없는 것을 알고 그쪽에 또 도장을 설립했다. 당시 브루스리의 바람을 타고 도장은 성업을 이뤘고 무려 11년간 도장을 운영했다. 신신식품 창립 –가장 큰 실패 보스톤 북부에도 한국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갔다. 도장을 하면서 야간에 일하는 세컨 잡을 잡았다. 그 회사가 잠수함을 만드는 GE였다. 이곳에서 8개월짜리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주급이 올랐다. 교육이 끝나면서 신고희 선생은 로렌스에 신신식품을 설립했다. 신신식품은 가장 큰 실패였지만 성공의 디딤돌이었다. 식품점을 차리면서 여기저기서 많은 빚을 지게 됐는데 초기라 장사가 시원치 않자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자꾸 지불한 체크가 바운스가 났다. 10불이 없어 바운스 나면 수수료만 15불을 주어야 할 뿐만 더러 도매상들에게는 신용이 깎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현찰을 받지 않으면 물건을 주지 않겠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며 너무도 참담한 상황을 겪었다. “조금씩 잘되는데 집어 칠 수 없어서” 굴욕을 참았고 7년 동안 신신에 메달렸다. 혼자서 새벽에 뉴욕 갔다 와서 새벽 4시까지 일하다 보니 경찰이 도둑인줄 알고 온 적도 있었다. 신 선생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내 인생이 전부 신신에 다 바쳤다”며 그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 가게를 자신의 처남에게 넘겼고, 그 처남 이석근씨는 하경남씨에게 다시 가게를 팔고 진 노래방을 설립해 지금까지 올스턴에서 운영하고 있다. 신신식품은 현재 같은 자리에서 안혜영씨가 운영하고 있다.
행운의 상점 다운타운 레인보우 성공은 다른 곳에서 왔다. 다운타운에서 하이볼티지(High Voltage)라는 가게를 운영하던 경제인협회 총무 원호영씨가 행운의 전달자였다. 원씨는 자기 가게 옆 조그만 가게를 사라고 권장했다. 신 선생은 가게를 보러 간 그날로 그 가게를 샀다. 그때가 52세가 되던 해였다. 가게 주인은 워낙 꼼꼼한 성격이어서 장사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는 처음 제시했던 가격보다 조금 더 높여 가게를 넘겼다. 레인보우는 잡화 및 잠바 등을 파는 가게였다. 지금 레인보우는 보스톤 발레가 공연하는 시티즌스 오페라 하우스로 바뀌었다. 모든 물건들을 하나씩만 두고 팔았던 전 주인과 달리 신 선생은 물건의 수만 늘렸다. 그랬더니 일주일 매상이 3배로 뛰었으며 장사가 너무 잘 됐다. 추후 원호영씨의 가게 하이볼티지(High Voltage)까지 인수했다. 하이볼티지는 토마스 에디슨 할아버지가 전기 도매를 했던 유서가 깊었던 곳이었다. 그 이후 한인 도매상에게 잠바와 신발을 떼서 팔았는데 정말 많은 돈을 벌게 됐다. 당시 차떼기로 도둑을 맞았지만 워낙 돈을 많이 벌던 시절이라 아무런 티도 안날 정도였다. 신 선생은 “그 때는 재미가 있었다. 마누라와 하루에 서너시간씩 돈을 세었다”는 것이다. “돈을 벌려 애쓸 때는 안벌어지고 별로 생각을 안해도 그냥 들어올 때가 있더라”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다시 한국으로 유턴 15년 전 큰 아들이 한국의 합참에 근무하던 시절 3남매가 모두 결혼을 하게 되자 노스 앤도버에 구입했던 집을 팔고 한국의 아파트를 구입해 귀국했다. 그러나 모험심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중국 청도에 고급 아파트를 구입했다. 아파트를 구입하며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해 힘들었던 것을 계기로 80의 나이에 방송통신대 중어 중문학과에 진학했다. 지난해(2019) 2월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84세의 나이에 다시 영어영문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중국의 고급아파트는 중국의 발전과 더불어 많은 시세차익을 남겨 주었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 상인의 혼이었다. 자식은 예술품이다. 신고희 선생의 자녀는 3남매다. 큰아들은 어려서 태권도를 잘했으며 공부도 곧잘 잘했다. 한국인 최초로 미공군사관학교(Air Force Academy)에 입학해 대령으로 예편했다. 둘째인 딸은 코넬을 졸업하고 골드만삭스에 들어가 근무하다 파리로 가서 큰 부를 쌓았다. 셋째 아들은 코넬을 나와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았고 현재는 올스턴에서 한국가든을 운영하고 있다. 어려울 때도 있었는데 자녀들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잘 키울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자식은 하나의 예술품이다. 잘돼도 못돼도 부모 책임이다. 항상 자식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된다. 늘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비유했다. 커뮤니티 리더 신고희 선생은 자신의 아픔을 나눌 줄 알았다. 먹고 싶던 샌드위치를 영어가 안돼 주문하지 못했던 아픔을 이해한 그였기에 한인들이 오면 일자리를 위해 대신 이력서를 작성했다. 그에 따르면 “이력서 한번으로는 안되잖아요. 취직 할 때까지 끌고 다니니까” 수백장의 이력서를 작성할 수 밖에 없었다.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었다. 노인들의 경우 소셜시큐리티 오피스에서 말을 실수하면 소셜시큐리티 연금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노인 한 분을 책임지면 그 분이 돈을 탈 때까지 쫓아다녔다. 식품점을 오전 10시에 열었는데 소셜시큐리티오피스는 9시에 문을 열기에 노인 분들을 오피스에 데려가서 10시에 문을 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멀리서 운전해 오는 손님들은 불평을 했다. 사정을 설명해도 이해는 하지만 사업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들었다. 그래도 돈이 없었던 자신의 이민 초기를 떠올린 그는 그들을 돕는 게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15년만에 보스톤을 찾은 그는 “5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라는 시가 가슴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앤도버와 로렌스 지역으로 대표되는 북부 보스톤에는 이제 수백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민 초기의 사람들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선 그래스필드 레스토랑에는 여전히 눈비가 섞여 내리고 있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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