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89 |
화랑세기花郞世紀, 12세 풍월주風月主 보리공菩利公(8) |
보스톤코리아 2019-10-21, 11:35:32 |
화랑세기花郞世紀, 12세 풍월주風月主 보리공菩利公(10) – 보리공은 591년에 풍월주에 취임하였다. 화랑세기에는 보리의 취임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날이 건복建福8년 춘정월 15일이다. 건복8년은 591년이고 정월 대보름날 취임하였다. 그리고 그 취임식은 남도南桃에서 이루어졌으며 함께 ‘남도의 예南桃之禮’도 있었다. 그럼 남도와 남도정궁는 어디의 무엇이며 남도의 예는 무엇인가? 먼저 삼국사기(권39, 직관)를 보면 딱 한군데 아주 간단하게 등장한다. “남도원궁 옹일인 南桃園宮 翁一人” 이것이 전부다. 명칭이나 문자를 그대로 해석해 미루어 볼 때 “궁성 남쪽에 있는 복숭아 과수원을 관리한 곳으로 보인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구복 외).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고 기록하지 않아도 될 내용을 아무런 설명이나 연관된 기사記史도 없이 달랑 노인 한 명이 관리한 것 같이 등장한다. 그런데 화랑세기에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등장한다. 남도와 남도정궁의 정확한 규묘와 역할을 명쾌하게 규명하지는 않지만 여러곳에서 등장하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 실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럼 그 실체를 관련된 기록을 통해 추정해보고자 한다. 첫째, 6세 풍월주 세종조에 보면 남도정궁南桃正宮에서 진흥왕과 미실이 합환合歡을 했다. 이날은 왕이 화랑도의 수장이었던 세종을 불러 풍월주의 위를 물러나게 하고 미실을 원화로 임명한 날이었다. 남모와 준정의 살인사건으로 폐지된지 29년만에 원화제도가 부활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진흥왕은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이라고 했다(아마도 총애하는 미실이 취임한 원화와 원화제도를 기념하고 지속적으로 화랑도의 대번창를 격려하고 기원하는 의미에서 대창으로 고쳤다고 본다. 그 때가 568년이었고, 572년 홍제鴻濟로 고칠 때까지 사용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고친 연유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자 세종을 따르던 낭도들은 세종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가지 않았다. 그러자 봉사랑奉事郞에 새로이 임명된 설원과 미생에게 모든 무리의 낭도들을 통솔하여 조알朝謁케 했다. 당시 진흥왕과 미실의 복장은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크게 잔치를 벌인 후 그들은 남도의 정궁에서 합환을 했다. 뿐만아니라 모든 낭도들에게도 새벽까지 노래하고 춤추며 야합토록 했다. 그날을 묘사한 장면은, “성중위 미녀로서 나온 자가 또한 만중萬衆이었다. 등불의 밝음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4해의 물을 끓어 오르게 했다. 진흥왕과 미실원화가 난간에 다다라 구경을 했다. 낭도들이 각기 한 명의 유화를 이끌고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며 그 아래를 지나갔는데, 그 때마다 만세 소리가 진동을 했다. 왕의 기쁨이 매우 커서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을 무리에게 던져주며 말하기를 “저들도 각기 자웅이고 나와 너도 또한 자웅이다”(6세 풍월주 세종조). 위에 인용한 내용을 봤을때 노인 혼자서 관리하는 복숭아 과수원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남도정궁을 삼국사기 편찬때 원궁으로 고쳤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복숭아桃는 은유적 표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추가적으로 왕이 신하들로 부터 받는 조알을 궁이 아닌 복숭아 과수원에서 받는다는건 좀 격의에서 벗어나는건 아닐까? 둘째로, 남도는 노인 한 명이 관리한 과수원이 아니라 유화들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사료된다. 7세 풍월주 설화랑의 아버지는 설성인데, 설성의 어머니가 남도에서 유화로 있을때 우연히 미남의 낭도를 만나 상통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출전하였고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룻밤의 상통으로 낳은 설성과 어렵게 살다가 구리지의 첩이 된 기록이 있다(7세 풍월주 설화랑조). 또한 10세 풍월주 미생랑조에 보면 미생이 남도로 갈 때마다 유화들이 그의 모습에 반해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는 기록을 보면 분명 많은 유화들이 남도에서 기거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위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남도에서는 상통相通이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남도의 예’로 이루어졌다. 12세 풍월주 보리공조에 보면 보리가 풍월주로 취임할 당시(591년), 부인 만룡낭주가 너무 어려(13세) ‘남도의 예’ 를 마루려 하자, 만룡은 “군은 낭도의 아버지인데 첩이 모도母道를 이루지 못하면 수치입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예정대로 풍월주 취임식을 하고 남도의 예를 행해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보리공은 건복8년 춘정월 15일에 풍월주의 지위에 나아갔다. 만룡낭주는 아직 겨우 13살이었다. 공은 어리다고 하여 예를 미루려 했다. 낭주가 말하기를 “군君은 낭도의 아버지인데 첩이 모도母道를 이루지 못하면 수치입니다” 했다. 이에 남도의 예를 행하고 사랑을 했다. 공이 기이하게 여긴즉, 낭주가 “후비厚婢가 나에게 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낭군이 그녀를 첩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했다.] 어린 만룡은 풍월주의 화주花主가 되어 남도의 예를 치르기 위해 침비 후단厚丹로 부터 ‘색도色道’를 배웠다. 침비 후단은 부모가 설화랑과 후만厚滿이고, 후만의 아버지는 비대공(법흥왕과 후궁 옥진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할 뻔 했음)인데 그녀의 신분이 비婢인 것으로 보아 후만의 어머니가 비婢였던 것으로 추측해 본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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