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도의 유산 (3) 설탕 단맛에 무너진 건강 |
보스톤코리아 2019-10-03, 19:16:17 |
미국 최대 규모의 도미노회사 설탕 공장은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를 지나는 미시시피강 변에 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침수로 가장 막심한 피해를 본 흑인 주거 지역은 이 공장으로부터 1 마일 떨어 진 데다. 이 공장은 년 20억 파운드의 설탕을 정제 생산하고 있다. 사탕수수 수확 철에는 그림에 보이는 4파운드 설탕 봉지를 일 분 마다 120개를 만드는 공정을 24시간 가동한다고 한다. 국내 여러 회사가 모두 9 백만 톤의 설탕을 생산하고 3백만 톤의 외국산 설탕을 수입하고 있다. 국내 설탕 회사는 정부로부터 수확량 보장, 가격 보조, 수입 설탕에 대한 관세부과 등으로, 년 40억불에 해당되는 지원을 받는다. 이는 국내산 설탕값의 반 정도에 해당한다. 시민 한 사람당 일 년에 80파운드를 소비하고 있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이 소비량은 2,000 칼로리 섭취하는 사람에게 권장하는 설탕량의 2배가 된다고 한다. 설탕이 당뇨와 암 질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지난 30년 간 성인 뚱보가 27% 늘어, 성인의 71%가 뚱보가 되었다. 성인 중 당뇨병 환자의 비율은 무려 3배 늘었다. 1493년 콜럼버스가 카나리 제도 (아프리카 동북쪽 대서양에 위치한 여러 작은 섬들)에서 사탕수수대를 카리브로 가져갔을 당시에는 오늘날의 막대한 생산량과 상업적 경제적 가치, 그리고 시민의 건강과 식단에 미칠 영향력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사탕수수대는 길이가 3~4m, 직경 5 cm로 무겁고, 단단하여 일일이 칼로 잘라야 하는 허리 부러지는 고된 노동이 필요하였다. 또한 잘린 대로부터 나오는 단물은 하루 이틀 사이에 변하기에, 속히 단물을 짜내고, 불로 조리는 수공업적 생산 공정으로는, 대량 생산은 불가능하여 유럽에서는 설탕은 사치품이었다. 카리브의 여러 섬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작된 노예 강제노동이 이 모든 것을 쉬이 바꾸었다. “흰색의 은”으로 불린 설탕으로 인한 무역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는 부를 축적하였다. 특히 영국은 미국대륙에 여러 콜로니(식민지)를 세울 수 있는 자본을 마련할 수 있었다. 1720년대 뉴욕항을 드나드는 상선 둘 중 하나는 설탕 혹은 노예를 수입하는 배거나, 육류, 조선에 필요한 자재, 혹은 밀가루를 수출하는 배였다. 이 무역은 매우 호황이어서, 오늘날 주식시장이 있는 월스트리트 한쪽에는 거대한 설탕 창고, 반대편에는 노예를 사고파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뉴욕의 노예 수가 인구의 20%가 되면서, 노예 통제를 위하여, 3명 이상의 노예끼리 만나는 것을 금하고, 마을마다 노예에게 매를 치는 전문인을 두도록 하였다. 뉴올리언스에는 1751년 사탕수수 농장이 시작되고, 1795년 순설탕 가루를 생산하면서, 미시시피강 양편에 사탕수수 농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런 배경에는 끝없이 넓은 비옥한 땅, 프랑스 농장에서 전수 받은 기술 그리고 수천 노예의 피와 땀 범벅의 고된 노동력이 있었다. 50년 만에 루이지애나주는 전 세계 설탕의 25%를 생산하였다. 한 때는 “ 여왕 설탕”이 “왕 면화”를 눌러 루이지애나주가 뉴욕주와 매사추세츠 주 다음으로 부유한 주이기도 하였다. 노예의 금전적 가치가 수천만 불에 이르러 이를 담보로 새로운 투자와 사업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루이지애나주 출신 의원은 미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발전”이라고 뽐내기도 하였다. 20년 사이에 노예숫자도 4배로 늘어 1850년 대에는 125,000이나 되었고, 뉴올리언스는 노예시장의 월마트가 되었다. 이런 뒷면에 노예들은 인간으로 겪기 어려운 비참한 삶이 있었다. 농토와 공장에서 가장 위험한 일들을 도맡아 했다. 아이들도 어른과 같이 공장에서 일하며, 펄펄 끓는 가마솥, 열린 화로에서 뿜는 불길, 돌고 있는 분쇄기의 롤러로 인한 위험에 항시 처해 있었다.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뉴올리언스에 있는 도미노 최신식 설탕 공장처럼, 설탕 작업소의 노예를 밤낮 없이 쉬지 않고 부렸다. 일체의 반항은 야만적인 폭력으로 제압 하였다. Mrs. Webb라는 노예는 자신의 주인이 사용하던 고문 상자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불복종하는 노예에 대한 한가지 고문 방법은 쇠못을 쳐 놓은 상자 안에 세워 놓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찔리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서 있는 노예는 파리를 쫓을 수도 없고, 개미가 몸 안으로 기어들어 가도 꿈쩍할 수 없었다고 한다. 루이지애나 주는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흑인의 생을 파괴하였다. 허리 부러지는 노동과 영양실조로 인해 루이지아나 주 노예 인구는 줄었다. 사탕수수 농장 노예의 평균 수명은 면화 농장 노예 수명보다 낮았고, 평균 7년 노동이면 사망한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각종 반찬은 물론, 불고기도 단맛에 이제 익숙해졌다. 노예제도의 유산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하다. ( 미국 노예제도는 1619년 여자 노예 안젤라로부터 시작되었다. 올해 만 400년을 기념하여 뉴욕타임스는 “1619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노예제도의 역사, 영향과 노예의 기여를 특집으로 내었다. 역자는 이를 번역하고 한인 이해를 돕고자 필요에 따라 첨삭도 하였다.) 윤희경 보스톤봉사회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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