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77 |
화랑세기花郞世紀, 11세 풍월주風月主 하종夏宗(18) |
보스톤코리아 2019-06-03, 10:07:23 |
신라의 제25대 진지왕이 황음무도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었지만, 그의 왕비 지도는 여전히 왕실에서 태후의 위를 지키며 태상태후인 사도(진흥왕의 정비, 대원신통의 주)와 만호태후(제26대 진평왕의 생모, 진골정통의 주)의 사이를 오가며 문노가 이끄는 문노정파의 화랑도를 지원하면서 자신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녀는 진지왕이 폐위된 후 천주공과 결혼하였다. 579년 진지왕은 폐위된 후 곧 사망했는데, 지도와 천주공의 결혼 시기는 기록이 없다. 다만 그들의 아들, 17세 풍월주를 역임한 염장공이 586년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화랑세기에 전한다.168) 이 두 기록을 근거로 추측하면 그들은 580 ~ 585년경에 결혼했다. 지도는 당시 태후의 위位에서 권세를 누리고 있었으니 비보랑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모여 들었다. 그렇게 형성된 세력은 지도태후의 아들인 김용춘을 화랑도의 부제로 올리기로 모의한 후 지도의 허락을 요청하였다. 하종은 588년에 풍월주의 위에 올랐고, 당시 부제는 보리랑이었다. 즉 보리랑을 제거하고 용춘을 부제로 앉혀 차기 풍월주로 삼자는 계획이었다. 578년생인 김용춘은 당시의 나이는 11~14세 정도였다. 용춘을 부제로 올리려한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종은 591년까지 풍월주의 위에 있었다. 하지만 비보랑의 ‘계략’을 만호태후(진평왕의 생모, 동륜태자의 비) 는 용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용춘은 비록 화랑도 부제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어머니 지도의 권세와 상선 비보랑의 지원으로 많은 화랑도들이 그의 수하로 몰려들었다. 대표적인 무리가 김서현이 이끌던 가야파의 낭도들이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당시 전방화랑으로 화랑도내의 3위 서열에 있었다. 그는 수하의 모든 낭도들을 용춘에게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였다.169) 당시의 부제로 있던 보리공 역시 용춘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기로 맹약하였다. 풍월주 하종은 미실의 아들이었고, 미실은 용춘 역시 대원신통이기에 김서현의 가야파 편입을 반기었다. 미실의 어머니 묘도와 지도의 어머니 흥도는 자매였기에 그들은 이종사촌간이다. 사도태후 또한 묘도와 흥도의 자매이다. 화랑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비보랑이 지도의 아들 용춘공을 천거하여 보리공을 대신하고자 했는데, 만호태후가 들어주지 않았다. 용춘공이 비록 위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낭도들이 많이 귀부했다. 서현랑이 말하기를 “용춘공은 선군先君의 아들인데 내가 어찌 감히 상대가 되겠는가?” 했다. 그 낭도들을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가야파가 또한 용춘공에게 돌아갔다. 역시 대원신통이었기에 미실파가 다투지 않았다.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좋은 사람을 얻었다” 했다. 보리공 또한 용춘공을 사랑하여 당을 달리 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진골과 대원의 논쟁이 이에 비로소 완화되었다. 하종공이 비록 모주母主에게 효성스러웠으나 형세를 살펴서 따랐으므로 안으로는 그 논論에 찬성했으나 밖으로는 감히 말하지 못했다.] 168) 염장공 부모의 가계를 보면, 아버지 천주공은 진흥왕과 월화궁주의 아들이다. 월화는 가야의 이뇌왕과 신라의 양화공주의 딸이다. 양화의 부모는 호조와 선혜(비처왕의 황후)이다. 그리고 어머니 지도부인의 부모는 기오공과 흥도이며, 흥도의 부모는 박영실과 옥진이다. 기오공의 부모는 홍기공과 선혜이다. 그래서 선혜는 염장의 외조부인 기오공의 어머니임과 동시에 친조모인 월화의 외조모이기도 하다. 169) 591년 미실의 명으로 부제로 있던 보리공이 12세 풍월주로, 전방화랑이었던 김서현이 부제가 되었다. 그러다가 서현이 만명萬明과 사통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만명의 어머니 만호萬呼는 노하여 서현을 부제의 자리에서 내리고 용춘에게로 잇도록 하였다. 이 후 서현과 만명의 사랑은 깊어만 갔고, 만명의 부모(숙흘종과 만호)는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더욱 굳어져 아무도 막지 못하였다. 그래서 숙흘종은 딸 만명을 별채에 가두었고, 김서현은 변방 만노군의 태수로 임명하여 내치려했다. 하지만 만명은 탈출하여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도망가서 김유신을 출산하였는데 그는 20개월만에 태어났다. 그들의 사통 사건으로 인하여 화랑도 부제의 위에 있던 김서현은 그 자리를 김용춘에게 주었고, 용춘은 보리공을 이어 13세 풍월주가 되었다. 김서현은 영영 풍월주가 되질 못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김유신(595 ~ 673년)은 건복建福29년 임신년(612년), 만17세의 나이로 15세 풍월주의 위位에 올랐다. 화랑세기에는 15세에 풍월주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화랑세기에도 그의 풍월주 취임 때가 건복29년이라고 나와있다. 건복29년은 임신년으로 서기612년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www.gch.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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