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75 |
화랑세기花郞世紀, 11세 풍월주風月主 하종夏宗(16) |
보스톤코리아 2019-05-20, 10:22:32 |
579년8월24일(음력 7월17일), 진지왕이 폐위되고 어린 김백정이 신라 제26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가 진평왕이다('진지왕의 폐위' 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삼국유사에는 있으며, 화랑세기에는 그 내용이 아주 상세하게 전한다). 진평왕의 출생연도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없는데 화랑세기에는 567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동륜태자는 572년에 사망하였다. 동륜태자는 태자빈 만호와 함께 아들 셋을 두었다. 장자 김백정(진평왕)과 백반과 국반이 그들이다. 백반(진정갈문왕)과 국반(진안갈문왕)의 생몰년은 알 수 없지만, 터울을 두살로 가정해 보면 화랑세기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백정이 12세에 왕위에 오를 당시 진흥왕의 후궁들인 미실과 보명이 좌우후左右后로서 색도를 하였다. 그는 미실과 보명 뿐만 아니라 세명의 태후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어른이 조모인 태상태후 사도법주(진흥왕의 비)였으며, 사도가 584년까지 섭정을 하였다. 다음은 진지왕의 왕비 지도태후이다. 그리고 생모인 만호태후, 그는 동륜태자의 빈으로 차기 왕비를 바라보다가 남편 동륜태자가 개에게 물려서 세상을 뜨자 왕비의 자리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만호태후는 왕비는 되지 못했지만 후일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태후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왕비가 되지 못하고도 대비가 된 사례가 있다. 성종의 생모 인수대비가 그 주인공이다. 한확의 딸로 1450년 세종의 첫 손자이자 수양대군의 장자인 만 12세의 도원군의 군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수양이 1453년 계유정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고, 우려가 현실이 되어 1455년 조카 단종을 '상왕으로 모시고' 왕위에 오르자, 도원군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가 의경세자이다. 세자빈이 된 한씨는 곧 왕비가 되는 수순이었지만 병약한 세자가 세조보다 먼저 만 19세에 요절하면서 왕비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절치부심하듯 사가에서 두 아들과 딸(장남 월산대군, 장녀 명숙공주, 차남 성종)을 키우고 있던 중, 세조의 차자로 왕위에 올랐던 예종이 13개월만에 죽자 왕위는 자신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에게로 돌아왔다. 1469년 성종으로 왕위에 오르자 환궁하였고, 도원군(의경세자)이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왕후의 시호를 받았다(인수자숙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慈淑徽肅明懿昭惠王后). 하지만 실제적으로 왕의 비가 되지 않고서 대비가 되었다. 이와는 다르게 조선 제18대왕 현종의 왕비 명성明聖왕후는 조선왕조에서 유일하게 소위 '3관왕' 을 쓴 주인공이다. 그는 효종의 적장자166) 인 현종이 세자로 있을 당시, 1651년 만 9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659년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물론 왕비가 되었다. 1674년 현종이 죽고 적장자 숙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가 되었고, 1683년 사망할때 까지 10여년간 대비로 있었다. 명성왕후처럼 적장자의 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으로 8,9년을, 다음에는 왕비로 15년간 지낸 후 적장자에게로 왕위가 양위되면서 왕대비로 10여년간 일생을 보낸 여인은 동서고금의 왕조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사례이다. 명성황후는 더 살 수도 있었는데, '지능이 비상하고 총명하였다'고 기록된 바와는 다르게,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멍청'하게 죽었다. 그녀에 관한 일화가 무수하지만 두 가지만 나누어 본다. 먼저 그녀는 총명하고 비상한 지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성격이 너무나 거칠고 사나워서 남편인 현종이 후궁을 한 명도 두지 못했다.167) 그리고 평소 무속신앙을 신봉했던 명성왕후는 1683년 아들 숙종이 병(奇疾)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아들의 무사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다. 무당이 숙종에게 삼재三災가 있어 기질을 앓고 있으니 어머니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채 물벌을 서야 한다고 계시를 내리자, 명성왕후는 무당의 황당한 주장을 받아드려 혹독한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홑치마에 삿갓을 쓰고 장시간 물벼락을 맞았다. 그로 인해 지독한 독감에 걸렸고, 결국 그해 12월5일(음력)에 만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무당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신들도 걸어다녀야 했던 궁궐에 대비의 권세로 옥교를 타고 출입을 했던 무녀, 모든 대신들이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벌떼같이 일어났지만 숙종은 그녀를 죽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걸로 명성왕후의 '홑치마와 물벌水罰 사건' 을 종결하였다. 166) 조선의 27왕 중 장자 승계를 한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7명뿐이다. 그런데 효종이 봉림대군으로 심양에 있을때 요절한 적1남이 있다. 죽은 날의 기록(1642년4월19일)은 전하는데 출생일의 기록은 없다. 아마도 며칠, 또는 몇 시간 살지 못했기에 적2자 현종을 장자 승계로 보는것 같다. 167) 실록(숙종9권, 6년)에는 현종의 승은을 입은 궁녀가 한 명 등장하지만 후궁은 없었다. 김상업金常業, 현종의 승은을 입은 유일한 궁녀, 그런데 그녀가 '홍수의 변紅袖之變' 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홍수의 변은 '삼복의 변' 의 발판이 되었고, 마침내 삼복의 변은 '경신환국' 으로 이어졌다. 홍수란 '붉은 옷소매' 란 뜻으로, 당시 궁궐의 젊은 나인들은 옷소매 끝동에 자주색 물을 들인 옷을 입었기에 '젊은 나인' 을 상징하는 호칭이다. 삼복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다. 삼복의 변은 명성왕후가 아버지 김우명과 짜고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삼복과 연적인 궁녀 김상업을 제거하기 위하여 삼복들이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를 간통하여 자식을 보았다며 꾸민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우명의 무고와 반전을 거듭한 삼복의 간통사건으로 김우명의 낙향과 죽음(자살?)으로, 허적의 서자 허견이 삼복과의 역적모의로 남인들의 사사와 옥사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김석주 와 김익훈은 서인들과 합세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였다(경신환국, 1680년). 역사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훗날의 기사환국, 갑술환국, 무고의 옥, 신임사화 등의 비극적인 참화로 연결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조선왕조실록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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