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69 |
화랑세기花郞世紀, 11세 풍월주風月主 하종夏宗(10) |
보스톤코리아 2019-04-08, 10:56:04 |
때는 572년, 신라 왕경에서 태자가 개에게 물려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진흥왕의 장자 동륜태자는 부왕의 후궁 보명궁주와 사통한지 일레째가 되는 날, 아무런 종자도 없이 혼자서 담장을 넘다가 그만 흉사하였다. 이에 진흥왕은 엄중한 조사를 명하였고 밝혀지는 연루자들의 면면은 왕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태자가 사통한 여인들은 자신의 아들 수종전군까지 낳은 미실마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분노가 극에 달한 왕은 큰 옥사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사도왕후의 간청으로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치고 죽은 아들 동륜의 명복을 빌었다. 한편 국경확장과 대외팽창 임무를 띠고 경외와 변방으로 나돌던 미실의 남편 세종은 귀환의 명을 받고 돌아왔다. 이에 미실은 죄인이라 칭하면 남편과 두 아들, 하종과 수종을 데리고 왕궁을 나와서 해궁으로 가서 살았다. 갑자기 갓태어난 아들 수종과 총애하는 미실이 떠난 왕궁은 진흥왕에게는 너무나 허전하였다. 왕은 미실이 미도媚道와 가무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던 지난날이 그리웠다. 그래서 아들이 보고싶다는 핑계로 미실을 불렀지만 미실은 죄인이라며 왕명을 거절하였다. 이에 진흥왕이 친히 해궁으로 미실을 찾았고, 그들은 함께 왕궁으로 돌아왔다. 미실의 남편이자 진흥왕의 이부동복 동생인 세종은 병부우령에 임명되었다. 위의 내용이 화랑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진흥제가 태자의 종인들을 조사했는데, 미실과 미생의 낭도들이 많았다. 미실의 추행醜行이 종인들의 입에서 많이 나왔다. 제帝가 비로소 의심하여 큰 옥사를 일으키려 하자, 미실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목 놓아 울며 궁을 나갔다. 공 또한 전군의 위를 사퇴했다. 사도왕후가 간하여 말하기를 “삼주三柱의 맹세가 있습니다. 어찌 천한 무리들의 어지러운 말로 총첩의 은혜를 빼앗고 죽은 아들의 혼령을 아프게 하려 합니까?” 했다. 진흥제가 이에 불문에 부치라는 조칙을 내렸다. 곧 다시 미실을 생각하고 제帝가 친히 거둥했다. 미실이 눈물을 흘리고 울며 왕을 붙들고 사죄를 했다. 제帝가 또한 받아드렸다. 그 때 세종공이 지방으로부터 소환되었다. 제帝가 다시 미실을 전주로 삼고자 했으나, 세종공에게 믿음을 잃을까 염려하여 그만두었다. 미실 또한 세종공의 지성에 감격하고 하종공의 부자와 단란한 즐거움을 가지려 하여 해궁海宮으로 피하여 가 살았다. 공은 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 세종공은 이에 미실과 더불어 공의 장수를 해신에게 빌었다. 그 때 수종전군이 어렸기에 따라가서 해궁에 있었다. 제帝가 수종을 본다는 핑계로 여러 번 불렀으나, 미실은 글을 올려 자기의 죄를 늘어놓고 거절했다. 제帝가 이에 친히 해궁에 거둥하여 서로 보고 … 눈물을 흘렸다. 미실이 감동하고 다시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제帝와 더불어 …로 돌아갔다. 세종공을 병부우령兵部右令으로 삼아 위로했다.] 미실의 가족은 해궁에서 살다가 진흥왕의 친히 찾아오는 기회로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다. 미실은 당시 남편 세종과 낳은 하종이 있었으며, 진흥왕을 모시기 전에 동륜태자 사이에서 낳은 애송공주도 있었다(진흥왕은 자신의 딸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진흥왕과 낳은 반야공주, 난야공주, 수종전군이 있었다. 또한 옥종玉宗을 임신하고 있었다. 미실의 가족이 왕경으로 오자 진흥왕은 미실의 입궁을 명하였다. 그러나 미실은 임신한 아이를 낳고 입궁하겠다고 청하였지만 진흥왕은 옥종을 마복자로 삼았다. 즉 옥종의 아버지는 세종이지만, 옥종을 임신한 미실은 진흥왕의 승은을 입고나서 옥종을 출산하게 되었으니 옥종은 진흥왕의 마복자였다. 마복자는 왕자나 공주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보호를 받았다. 당시 마복자란 왕의 마복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였고, 하위 계급의 임신한 여성이 상위 계급의 남성과 성관계를 하여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마복자였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왕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 시대에 있었던, 아주 광범위하게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퍼져있던 풍습이었다. 왕을 비롯한 풍월주, 또는 조직의 우두머리들이 여러명의 마복자를 두어 충성스러운 신하를 얻고, 마복자들은 유력한 후원자를 얻으면서 서로가 보호를 받고 또한 권력을 향유하였다. 화랑의 풍월주들은 많은 낭두들의 아내로 부터 색공을 받았고 또한 많은 마복자들을 신하로 두었다(당시 칭신은 임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진흥왕의 명으로 옥종을 임신한 미실은 입궁하여 왕을 모셨고, 왕후궁 왼편에 새로운 궁을 지어 미실의 가족 모두 왕궁에서 살도록 했다. 물론 남편 세종도 함께 입궁하여 살았다. 진흥왕은 점점 노쇠하여졌고 풍질風疾에 시달리면서 정사를 보지 못했다. 다만 왕후 사도와 후궁들인 미실, 보명, 옥리, 월화 등과 향락에만 도취되었다. 결국 정사는 미실이 이모인 사도왕후와 내정을 좌지우지했고, 외정은 세종과 설원, 미생이 마음대로 했다. 설원은 7세 풍월주를 역임했고 미실의 연인이었다. 미생은 미실의 동생이며 10세 풍월주를 지냈다. 결국 그들의 권력은 진흥왕이 죽은 후 576년에도 계속되어 동륜태자의 장자인 백정 대신 진흥왕의 차자인 사륜태자를 진지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579년 진지왕이 ‘황음무도’ 하다는 이유로 폐위하고 백정을 진평왕으로 세웠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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