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자격이 있어야 금관을 쓸 수 있다
보스톤코리아  2019-04-08, 10:54:56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이 최초로 발견되었을 때 금관은 의례 왕이 쓰는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는 함께 출토된 여성용 굵은 귀거리 (태환 이식)가 있어서 무덤의 주인이 여성이라는 것이 통설이 되었다. 발굴 유물도 금귀거리, 금팔찌, 금반지, 금동신발 금 장식류가 7.5kgm 나 되어 상대적으로 무기류를 압도하고 있어 무덤의 주인은 여성이라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러나 금관에 매다는 장식이 남성용인 가는 귀거리가 발견되어 무덤 주인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많게 되었다. 2014년에 금관총에서 “이사지왕도” (이斯智王刀) 라는 명문이 새겨진 칼집이 발견되면서 또다시 무덤 주인이 누구냐는 논란이 떠오르게 되었다. 윤상덕 중앙 박물관 연구관은 금관총 봉분을 둘러싸고 밖은 호석의 둘레가 45m인데 동상 마립간의 호석은 50m가 넘는다고 하며 금관총은 마립간의 무덤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증언하였다. 또 창, 화살촉, 마구, 갑옷, 등 부장품을 분석한 결과 피장자는 남성이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사지 왕은 신라왕이 아닌 마립간이 아니라 6부의 최고위층인 귀족 신분이라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신라에서 왕의 호칭은 왕만 쓰던 것이 아니었다. 

왕의 친족들에게도 갈문왕이라는 호칭을 주어 왕의 아버지, 장인, 동생, 여왕의 남편 등에게 특별한 사회적 의미를 부여해서 신라 초기에는 2인자 기능을 하고 있었다. 선덕여왕 남편은 음갈문왕 박수월 (朴水月), 또는 차칠왕으로 불렸고 원성왕과 왕위 경쟁을 벌인 김주원은 명주 (溟州) 군왕으로 불렸다. 이처럼 금관총의 주인도 왕이 아니라 귀족 출신으로 보여진다.

ll) 1924년에 발견된 금령총과 교동금관은 10여세 정도의 어린 소년이었다는 내용은 이미 전주 컬럼에서 말한 바 있었다. 

lll) 서봉총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발굴되었다. 남성 고분에서 흔히 보이는 큰 칼이나 관모가 나오지 않고 태환 이식 귀거리를 하고 있어 여자 무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장품에는 곡옥을 꿰어 만든 목걸이, 금반지, 비취곡옥을 단 가슴 장식, 금팔찌 등을 참작하면 피장자가 여자 였음을  확신할 수 있다. 

부장품 중에 은으로 만든 그릇은 연수원년 태왕신묘 (延壽元年 太王辛卯)라는 명문이 새겨져 고구려 장수왕 때 만든 무덤의 조성 연대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구려 장수왕 (413-491)의 년호가 연수라는 점으로 미루어 신묘년은 AD 451년으로 생각된다.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때라 장수왕의 은합이 부장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신라 눌지왕 재위 년간이었다. 

lV) 천마총은 1973년에 발굴 되었다. 21대 소지 마립간(479~500)이 사망하자 그의 6촌이었던 지증마립간이 6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지증왕 (500~514)이 되었고, 76세로 사망하였다. 지증왕 때 지금까지 내려오던 순장 풍습을 폐지했고 이때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했다. 지증왕의 아들 법흥왕 때부터 불교가 공인되고 대형 고분을 만들던 적석목곽분이 사라지고, 호화금제품 부장을 금지하면서 더이상 금관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김병모 박사는 순장의 풍습을 중지시킨 지증왕이 천마총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천마총에는 일절 순장의 흔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V) 황남대총은 대릉원에서 제일 큰 무덤으로 쌍분이다. 북분이 왕비의 무덤이고 남분이 왕의 무덤이다. 북분은 은제 허리띠에 부인대 (夫人帶) 라고 쓰인 명문이 있어 왕비의 무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남분은 60세 전후의 남자로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여자 유골과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 발굴된 유물은 금관이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은관과 금동관만 출토 되었다. 도대체 금관은 어데로 갔을까? 

“요시미츠 쓰네요” 는 그의 저서 “로마 왕국과 신라”에서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을 실성 마립간으로 보고있다. 그는 미추왕의 사위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며 성골왕족으로 금관을 쓸 자격을 가지고 있지만 실성마립간은 성골이 아니라서 금관을 쓸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왕비는 금관을 쓰고 실성은 은관을 쓰고 누워있는 것이다. 실성이 눌지에게 피살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황남대총 같은 대형 무덤을 만들어 주었을까? 요시미츠 츠네오는 이에 대한 답변은 실성을 먼저 보지 말고 왕비를 먼저보면 답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즉, 왕비의 지위가 왕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시미추의 언급에 반하여 필자는 내물마립간의 손을 들어 주었다. AD 360년 내물마립간 때 두번에 걸쳐 위두라는 신라 사신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전진(前秦) 황제 부견 (符堅)을 접견했는데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해동 (海東)의 형편이 옛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 고 하거늘 대답하되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 변혁, 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으리오 하였다. 이는 당시 석씨 세력이 물러나고 김씨 쪽으로 급변 시기였고 문화적으로는 적석목곽분, 황금문화, 금관문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국제적으로는 고구려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 가야, 왜 세 나라가 동맹 관계에 있던 때로 내물마립간은 격동하는 제반 정세의 중심에서 최선의 역활을 훌륭하게 수행한 지도자였다. 그래서 사후에 세운 무덤도 엄청나게 큰 무덤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니겠는가.

내물, 실성 두 사람은 두명 모두 미추왕의 딸과 결혼했고, 두 명 모두 성골 왕이 아니었으며 두 명 모두 금관을 쓸 자격이 없었다. 그러면 누가 황남대총의 주인일까? 눌지 마립간이 실성을 죽이고 왕이 됐는데 죽인 사람을 고분의 주인으로 정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내물 마립간이 황남대총의 주인이다. 

지금까지 금관을 쓸 수 있었던 6명을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금관총의 주인은 귀족이었고, 금령총과 교동금관의 주인은 어린 아이였다. 서봉총은 성인 여성이 주인이었고, 천마총의 주인은 순장의 흔적이 없는 지증왕으로 김병모 교수가 주장하고 있다. 황남대총 북분은 왕비로 추정되는데 남분의 주인은 필자의 의견은 내물 마립간으로 추정되지만 앞으로도 금관의 주인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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