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68 |
화랑세기花郞世紀, 11세 풍월주風月主 하종夏宗(9) |
보스톤코리아 2019-03-21, 19:44:25 |
572년, 진흥왕의 장자 동륜태자가 부왕의 후궁인 보명궁주의 치맛폭을 풀려고 월담을 하다가 개에게 물려 죽었다. 이에 진흥왕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하여 태자궁의 종인들을 조사하였다. 종인들에 의하여 하나씩 밝혀진 태자의 여색행각은 왕녀들과 여염집 아낙들을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후궁들인 보명과 미실과도 상통하였다. 당시 태자 동륜은 미실의 동생 미생과 죽이 맞아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여색를 탐하러 궁내외를 쏘다녔다. 미실은 데리고 있던 낭도들에 의하여 자신의 추행도 밝혀졌다. 그리고 그녀는 왕의 진노를 모면하려고 스스로 출궁을 택하였다. 동시에 하종공도 어머니의 잘못을 속죄하듯 ‘전군’ 의 위를 사퇴하였다. 태자를 잃은 왕궁은 슬픔에 잠겼고, 그가 저지른 색사의 행각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진흥왕은 미실과 미생을 비롯하여 모든 연루자들을 잡아드려 큰 옥사를 일으키려 하였지만, 사도왕후가 ‘천한 무리들의 어지러운 말로 총첩의 은혜를 빼앗고 죽은 아들의 영혼을 아프게 할 수는 없다’ 며 미실의 용서를 간청하였다. 그러자 진흥왕은 왕후의 간청을 받아드려 동륜태자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색사를 불문에 부치라는 조칙을 내리고 미실도 용서하였다. 이에 미실은 다시 입궁하여 눈물로 사죄하고 진흥왕은 모셨다. 한편 미실의 남편 세종은 그 동안 신라의 변방을 돌며 국방을 튼튼히 하고 국경을 넓혀가고 있었다. 당시 그는 6세 풍월주의 위에 있었지만 진흥왕이 미실을 후궁으로 취하면서 변방으로 나가게 되었고, 경내의 낭도들은 미실이 원화의 위에 올라 지휘하고 있었다. 동륜태자의 ‘개 죽음’ 사건과 동시에 진흥왕은 세종을 소환하였다. 왕성으로 돌아온 세종은 진흥왕과 미실의 관계에 아랑곳하지 않고 왕에게는 충성을 받쳤고 아내 미실에게는 지성으로 대하였다. 이에 왕은 미실의 색도와 가무를 잊지못하고 계속 전주殿主로 삼아 후궁으로 데리고 있고 싶었지만 세종의 충성심을 잃을까 염려하기도 하였고, 동시에 미실도 자신이 동륜태자와의 관계로 인한 죄인이라며 지아비와 함께 살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진흥왕은 허락하였고, 오랜만에 재회한 세종과 미실은 아들 하종과 어린 수종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해궁海宮으로 가서 살았다. 부모는 자식들을 사랑하며 건강을 해신海神에게 기도하였고, 늠름한 화랑으로 성장하는 하종은 부모들을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 여기 나오는 해궁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실제로 동해안 어느 해변에 있었는지 또는 강변이나 연못이 있는 주택이었는지 아무런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다만 원문으로 봤을때 실제로 바닷가에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원문에는 ‘해궁으로 피하여 가 살았다, 피거해궁避居海宮’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종욱은(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 178쪽) 미실의 가족이 살았던 해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로 바닷가에 있는 궁일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해신의 존재가 주목의 대상이다. 또 바닷가 해궁이 어디에 있었는지 고고학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한편 왕경 안에 있는 저택에 연못이 있어, 그 저택을 해궁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생각 할 수 있다.” 수종전군은 진흥왕의 아들이었지만 당시 태어나서 49일(또는 77일)에 전군 봉례식을 받은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던 갓난 아이였기에 미실이 데리고 해궁에서 살았다. 한편 진흥왕은 수종전군이 보고 싶다는 핑계로 여러번 미실에게 입궁하라고 명했지만 그때 마다 미실은 죄인이라는 핑계의 글을 올리고 입궁하지 않았다. 아들 수종이 보고 싶어, 사실은 미실일 가능성이 더 많다, 견딜 수 없었던 진흥왕은 친히 해궁으로 갔다. 그리고 왕과 미실은 눈물의 재회를 했다. 왕이 자신이 거처하는 해궁까지 친히 거둥하니 마음이 움직인 미실은 왕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세종은 병부우령兵部右令에 제수되었다. 병부는 최초로 설치된 신라의 중앙관서이며 모든 군사사무를 관장하는 기구였다. 병부령은 군사조직에 대한 최고의 지휘권자였다. 삼국사기(직관지職官志) 에 보면 중앙관서의 장관들은 대부분 대아찬(5등급)에서 아찬(2등급)까지지만, 병부령은 대아찬에서 태대각간까지이다. 즉 관등이 다른 장관들보다 높았다. 병부령은 법흥왕3년(516년)에 설치되었고, 진흥왕 5년(544년)에 1인을 더했으며, 태종무열왕 6년(659년)에 1인이 또 추가되어 모두 3인이었다. 세종이 병부령으로 임명되었던 시기에는 우령과 좌령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부령이 설치된 시기와 추가된 시점이 6~7세기로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고 삼국을 통일해 나가던 시기와 같다. 즉 신라의 국경확장과 군사업무의 증가로 병부의 설치와 병부령 증원의 필요성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병부령은 평시와 전시의 위상이 조금 달랐음을 볼 수도 있다. 평시에는 모든 군사업무를 주관하는 병부의 수장으로서 군령체계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전시에는 다른 장군들과의 위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도 볼 수 있다. 일례로 태종무열왕과 문무왕대에 걸쳐 병부령을 지낸 진주眞珠는 대장군 김유신에 비해 그 지위가 낮았음을 볼 수 있다. 즉 5등급 아찬에서 1등급 이벌찬(또는 각간), 태대각간까지 누가 임명되느냐에 따라 그 위상도 달라졌을 것이다. 태대각간은 문무왕 8년인 68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김유신에게 종전의 17관등과 대각간에 한 단계 더 높혀 표창한 관직이었다. 대각간은 1등급인 각간보다 더 높고, 태대각간은 대각간보다 더 높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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