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63 |
화랑세기花郞世紀, 11세 풍월주風月主 하종夏宗(4) |
보스톤코리아 2019-02-18, 10:22:09 |
조선왕조실록에는 수 많은 인물들의 기록이 있다. 미관말직이나 하층민들도 어떤 사건의 조연으로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또 어떤 인물은 이름만 내밀고 있지만, 대부분의 당상관들은 본관과 가계, 생몰년과 과거급제, 그 후 관직제수 등 그들의 행적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후세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최고위직의 관등이나 마지막으로 지낸 벼슬로 기억되어 전해진다. 한편 고대로 올라가면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심지어 왕들의 출생연도 기록조차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개 그들의 재위기간과 사망연도는 기록되어 있다.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도 예외는 아니어서 생몰년의 기록이 없다. 다만 문무왕(재위 661 ~ 681년)대에 태어나서 성덕왕(재위 702 ~ 737년)대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태종무열왕(재위654 ~ 661년)대에 태어났을 가능성과 효성왕(재위737 ~ 742년)대까지 생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55) 김대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아주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김대문은 본디 신라 귀족의 자제로, 성덕왕 3년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고, 전기傳記 약간 권을 지었으며, 그의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는 아직 남아 있다” 위의 기록이 전부다. 그것도 설총薛聰전에 딸려 있는 기록이다.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설화를 모은 설화집인 계림잡전鷄林雜傳을 통해 간접적으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부분도 있다. 성덕왕 3년은 704년이다. 위의 기록으로 인하여 김대문이 지낸 최고위 관직이 도독이었을 거라고 믿는 후학들이 대다수이다. 많은 기록에는 화랑세기가 35년간 재위한 성덕왕 대에 집필되었다고 넓게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화랑세기를 비롯한 어느 사서에도 정확한 연도는 등장하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화랑세기 집필을 완성한 연대를 704년 전으로 보는 견해도 있긴한데, 김대문이 한산주 도독을 얼마동안 재임했다는 기록이 없어서 선뜻 동의하기가 망설여진다. 화랑세기의 발문에 따르면 “불초자식이 공무의 여가에 낭정郎政의 큰일大者을 모으고, 파맥派脈의 정사正邪를 밝혀 아버지의 계고稽古의 뜻을 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156) 이 기록으로 인하여 화랑세기가 이미 한산주 도독으로 부임하기 전에 집필되었거나, 도독 재임 중에 완성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런데 화랑세기(필사본)의 내용을 자세하게 보면 집필을 완성한 연대가 좀 좁혀짐과 동시에 김대문의 관직이 한산주 도독이 마지막(최고위에 오른…) 관위가 아닐 가능성 마저 있다. 19세 풍월주 김흠순 전에 보면 그의 아홉째 아들인 원훈元訓이 중시中侍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신라본기 성덕왕 원년, 702년 9월조)를 보면 “아찬 원훈元訓을 중시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이듬해인 성덕왕2년 7월조에 “중시 원훈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아찬 원문元文을 중시로 삼았다” 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들로 봤을때 화랑세기의 집필 완성은 703년 이전이 될 수는 없다. 704년에 한산주 도독으로 부임한 김대문의 재임기간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한산주 도독으로 있을때 부친이 탈고하지 못한 화랑세기의 집필을 계속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부친 오기공이 얼마나 작성하고 김대문이 얼마나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한산주 도독 재임시 탈고를 했는지 또는 타직으로 이직하여 마무리했느지의 기록도 없다. 물론 한산주 도독 이후의 관직 기록은 없다. 155) 제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 ~ 661년), 제30대 문무왕(재위 661 ~ 681년), 제 31대 신문왕(재위 681 ~ 692년), 제 32대 효소왕(재위 692 ~ 702년), 제33대 성덕왕(재위 702 ~ 737년), 제34대 효성왕(재위 737 ~ 742). 156) 불초자식은 김대문 자신을 가리키고, 낭정의 큰일이란 화랑도의 편제와 조직과 구성 등을 의미한다. 파맥은 설화랑의 운상인, 문노의 호국선 등의 계통과 진골정통, 대원신통, 가야파 등의 파맥으로 그 내용이 10세 풍월주 미생전에 자세하게 나온다. 그리고 화랑도들은 수 많은 전쟁에 참전하여 삼국통일을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하지만 때때로 정난에 참가하여 중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진지왕 폐위 때도 문노가 이끄는 화랑도의 세력이 한 몫을 했지만, 대표적인 정사正邪의 예는 김흠돌이 흥원과 진공 등과 함께 모반을 하였을때 화랑들은 김흠돌 파와 진압군인 오기공 파에 나누어 가담했다.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으며, 그의 모반죄로 왕비인 딸도 폐출되었고, 계비로 김흠운의 딸을 들였으며 그가 신목왕후이다. 제32대 효소왕과 제33대 성덕왕은 신목왕후의 소생이다. 김흠운과 김흠돌은 형제이며 그들의 아버지는 김달복이고 어머니는 김정희이다. 김정희는 김서현의 딸로 김유신의 누이이다. 김흠운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 요석공주의 첫 남편이었으며, 655년 조천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후 요석공주는 원효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았다. 이 설총전에 김대문의 기록이 ‘곁살이’를 하며 삼국사기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www.gch.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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