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마 인물형 토기> |
보스톤코리아 2019-02-04, 10:48:21 |
신라의 고도 경주에는 155개나 되는 여러 고분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중 단일 무덤으로는 노동리에 있는 봉황대 고분이 제일 큰 무덤이다. 이 고분의 둘레만 해도 250m나 되는 엄청나게 큰 무덤으로 15m 떨어진 바로 남쪽에는지금은 봉분도 없이 평토분으로 남아있는 아주 조그마한 무덤이 어깨를 감추며 숨어있다. 바로 금령총이다. 봉황대 무덤과는 많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옛적부터 학자들은 두 무덤간에는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사연이 있다고 생각해 오고 있었다. 지금부터 90여년전인 1924년에 총독부 명에 의하여 일본사람 우메하라씨가 금령총을 발굴하였다. 발굴 당시에 금령총은 지름이 13m, 높이 3m에 불과한 아주 작은 무덤이었다. 비록 작은 무덤이지만 금관은 물론이고, 금과대, 금귀걸이, 금팔찌, 금 가락지, 금동신발, 금목걸이,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관모 등 왕릉에 버금가는 대단한 유물이 부장되어 막상 발굴해서 얻은 수확은 거대 고분 봉황대에 못지 않는 엄청난 것이었다. 부장품은 살아 생전에 가장 소중하고 가까이 했던 물건과 함께 묻어주는 풍습이 있다. 사용하지 않거나 가까이 하지 않는 물건을 매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기 5세기 경에 신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귀중품은 금이었다. 금령총의 귀중품도 거의 모두가 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3세기 중엽에 쓰여진 중국 역사책 "삼국지"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옥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다 하지만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금이 별거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라에서 황금을 귀하게 여긴 것은 언제부터인가? 신라 황금 문화가 시작되고 끝난 것은 5세기때 시작되서 6세기에 끝난 100여년간에 있었던 일이었다. 내물왕때 김씨 익가가 석씨들을 제치고 마립간 시대를 시작하면서 황금문화가 시작되고, 적석 목관분과 금관이 동시에 출현하게 되었다. 실제로 금관이 나타났던 시기는 실성왕, 눌지왕, 지비왕, 소지왕, 지증왕 다섯 명 왕의 재위시절에 불과하다. 신라금관은 지금까지 모두 6개가 발견되었다. 앞으로 몇개가 더 발견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봉황대 무덤처럼 큰 무덤에서 금관이 나올 확률이 높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발굴된 금령총 금관은 아주 작은 금관이었다. 금관의 머리 관테의 지름이 16cm에 불과했고, 허리띠의 길이는 71cm로 아주 짧았다. 금관총은 머리 지름이 19cm, 허리띠의 길이는 111cm나 되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금령총 묘주는10세 정도의 어린 나이로 짐작되었다. 본인이 아주 작은 환두 대도를 지니고 있으니 나이어린 왕자로 추정하게 되었다. 금관의 입식은 나무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나무에 달려 있는 생명의 열매가 바로 곡옥이다. 금령총 금관에는 있어야할 곡옥이 없다. 이것은 본인이 아직 성숙하지 못했거나 사망했다는 말이다. 곡옥은 출산, 풍요를 뜻하고 신성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알타이 민족ㄷ르에게는 보편적인 사실로 알려지고 있다. 경주 교동 금관에도 곡옥이 없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성숙되기 전에 사망한 것이다. BC 5세기경에 그려진 알타이-스키타이 미술품이 있다. 쿠르간(적석 목곽분) 벽면에 그려진 그림에는 말의 콧잔등에 곡옥이 달려 있다. 생명을 보호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예전에 신라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귀걸이를 착용하고 다녔다. 여자는 보통 굵은 귀걸이(태환이식)를 사용했고 남자는 가는 귀걸이(세환이식)을 사용했는데, 금령총 묘주는 태환이식과 세환이식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남자의 상징인 큰 칼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그를 어린 왕자로 추정하게 된 것이다. 금관의 장식에는 여러가지 숨겨진 의미가 있다. 고대 한국인들은 나무와 사슴이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사다리와 같은 존재라고 믿었다. 신은 나무를 통해 인간 세상에 내려오고, 또 인간은 사슴을 통해 자신의 뜻을 신의 세계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인간 세상을 넘어, 곧 신의 세계에 속한다. 나무와 사슴을 표현한 금관을 씌워 죽음 이후의 세계에 영생의 길을 택한 것이다. 금관에서 영락(달개)는 자작나무 잎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자작나무 잎을 통해 하늘의 메세지를 전달받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현실세계의 삶이 죽은 다음에도 계속 이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생전에 사용하던 용구를 계속 사용하고 죽은 다음에도 예전처럼 계속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집이나 배, 말 같은 부피가 큰 물건들은 크기를 줄여 토기를 만들어 무덤에 넣어주곤 했던 것이다. 금령총은 한쌍의 기마 인물형 토기와 한쌍의 배모양 토기, 또 한쌍의 등잔모양 토기를 부장시키고 있다. <기마 인물형 토기, 국보 91호> 우리나라에서 말은 삼국시대부터 벽화나 토기의 문양, 토우 등에 나타나고 있는데 기마 인물형 토기처럼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묘사된 예가 없었다. 말이 재갈을 물고, 고삐, 안장, 말등자, 말다래, 말띠드리개 등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마 무사가 뾰족한 유목민의 삼각모를 쓰고 있는데, 예전의 몽고 사람들도 똑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 머리는 납작한 편두 모습을 하고 있다. 위지 동이전에 진한 사람들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동이족 사이에 유행했던 풍속이다. 신라 법흥왕도 편두머리였다. 흉노는 편두가 아니었지만 훈족은 편두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 전세계에서 말 타는 법을 처음으로 터득한 사람들은 스키타이였다. 그들은 옷이 바람에 부풀리는 것을 방지하려고 처음으로 바지를 입기 시작하였다. 흉노는 바지를 입고 발목에 다님을 매서 바람을 잠재웠다. 우리 민족은 발음하기 쉽게 흉노의 다님을 대님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 우리 선조들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에서 보듯이 말안장과 말등자가 있으면 고삐를 잡지 않아도 양손을 사용할 수 있어서 허리를 뒤로 돌리고도 활을 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진시황때가 되서야 안장 사용하는 법을 배웠고, 로마는 6세기 훈족들이 물러간 뒤에야 안장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 사진에 보이는 동복은 흉노를 상징하는 유물이었다. 흉노 수장들은 동복을 말등에 싣고 다니며 제사와 취사 도구로 사용하였다. 수장이 사망하면 사용하던 동복을 다음 수장이 물려 받곤 하였다. 김해 대성동은 가야 왕족들의 묘지이다. 대성동 29호와 47호분에서 동복이 발견되었고 양동리에서도 동복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김해 가야의 왕족들에게 흉노의 피가 섞여 있다는 말이다. 신라와 가야에서 말은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하지만 말과 새가 죽은 사람을 천상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신라, 가야의 무덤에 말과 새의 조형물이 많이 나오는 이유이다. · 하인으로 보여지는 또하나의 기마 인물형 토기는 웃통을 벗고 맨 상투바람으로 방울을 들고 앞장서서 주인을 안내하고 있다. 바른쪽 어깨에서 허리에 이르는 보따리는 돈전대로 보인다. 저승길을 여행하려면 비용이 대단할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 비해 말가춤을 간단하게 갖추고 있다. <배모양 토기> 예로부터 배나 말은 짚신과 함께 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수송수단의 하나였다. 이로 미루어보면 배는 죽은 묘주를 저세상으로 태워 보낸다는 뜻이 있고, 말탄 묘주도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죽은 이의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려는 신라 사람들으 정신 문화를 가늠하게 하고 있다. 뱃사공이 옷을 입지 않고 성기를 내보이는 행위는 다산과 풍요를 의미하고 있다. 큼직한 코와 두드러진 귀, 과장되기 보이는 성기가 본인의 성격을 잘 들어내고 있다. <다등식 등잔> 저승으로 가는 길은 춥고도 어두운 길이다. 밝고 따뜻한 곳에서 살기를 바라는 희망이 깃들어 있다. 백제 무령왕의 무덤방에도 등잔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상형 토기는 신라인들의 영혼관과 생활을 설며 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상형토기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저세상으로 인도해주는 주술적 기능을 실라 사람드은 굳게 믿고 있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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