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49 |
화랑세기花郞世紀, 10세 풍월주風月主 미생랑美生郞(2) |
보스톤코리아 2018-10-29, 11:10:16 |
화랑세기의 기록을 보면, [미생은 경오년생이고 을사년에 화랑의 주가 되었다. 10세 미생랑은 미진부공의 아들이다. 공의 손윗누이는 미실궁주라고 하는데, 진흥대왕에게서 커다란 총애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공 또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왕이 여러 번 불러 입궁하여 동태자, 금태자 등과 더불어 토함공에게 함께 배웠다. 얼굴이 아름답고 아양을 잘 부려 두 태자 또한 총애했다. 만덕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했다. 사도왕후가 여러 공주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했다. 공주들이 많이 사사로이 관계를 가졌는데, 제帝가 문초하려 한 즉 후后가 말하기를, “이는 우리 집의 풍류접風流蝶입니다. 어찌 모름지기 문초를 하겠습니까?” 했다. 제帝는 또한 미실에게 빠져 있었던 까닭에 마침내 문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미실이 미생에게 명하여 사다함공을 따르게 하여 낭도가 되었다. 당시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는데 말에 오를 수 없었다. 미진부공이 내쫓으려 하자, 미실이 말하기를 “어찌 나의 아우를 한번에 내칩니까?” 했다. 사다함 또한 부득이 받아드렸다. 문노가 꾸짖어 “무릇 낭도란 자의 힘이 말에 오를 수 없고, 검을 사용할 수 없다면, 하루아침에 일을 당할 때 어디에 쓸 것인가?” 했다.] 미생이 태어난 경오년은 550년이고, 그가 풍월주가 된 을사년은 585년으로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풍월주가 되었다. 8세 풍월주였던 문노는 더 늦은 나이에 풍월주에 올랐지만 사다함은 16세에 풍월주가 되기도 하였다. 위 인용문에 등장한 인물들의 면면과 관계를 살펴 본다. 먼저 제帝는 진흥왕을 말하며, 후后는 진흥왕비 사도를 말한다. 미진부는 미실과 미생의 아버지이다. 미진부의 부모는 아시공과 삼엽궁주인데, 아시공의 증조부가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을 때 박제상이 구해온 눌지왕의 동생 복호이다. 삼엽궁주는 법흥왕의 딸이다. 그리고 미실과 미생의 어머니는 묘도부인인데 진흥왕의 왕비 사도와는 자매지간이고, 그들의 부모는 박영실과 옥진궁주이다.242) 동태자와 금태자는 동륜과 금륜(또는 사륜)인데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아들들이다. 후에 동륜은 부왕의 후궁 보명궁주의 치맛폭을 풀려고 월담하다가 개에게 물려서 죽었고, 금륜은 제25대 진지왕이 되었다. 동륜의 장남 백정은 진평왕이 되었고,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가 태종무열왕 김춘추이다. 다음으로 궁궐에서 왕자들과 공주들의 학문과 무예를 지도한 토함공과 5세 풍월주를 지낸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들이다. 어머니는 금진낭주, 그녀는 옥진의 동생이며 위화랑의 딸로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다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출궁당했다. 그러자 그녀를 5년간이나 연모하며 발원기도를 올렸던 구리지가 자신의 기도가 응답했다며 찾아가서 원화로 추대하겠다고 환심을 사면서 교제하다가 결혼하였다. 그리고 토함과 사다함 딸 새달을 낳았다. 구리지의 아버지 비량공은 벽화후243) 를 너무나 사모하여 그녀가 가는 뒷간에서 매일 기다리다가 마침내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구리지라 했다. 구리지는 이름은 구리지만 아름답기는 벽화와 같았고, 담력은 비량과 같았다. 562년 9월 사다함이 가야정벌에 출정하기 전까지 사다함과 미실은 연인사이였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해보니 미실은 이미 세종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8세 풍월주 지내며 신기의 격검술을 보유했던 문노는 사다함과 함께 비지의 증손자이다. 하지만 그들은 증조모가 다르기에 조부가 다르다. 242) 박영실과 옥진이 결혼하는 날 법흥왕이 참석하였다. 왕의 참석으로 더욱 축복된 결혼식을 마치기가 바쁘게, 옥진의 미모에 빠진 왕은 그만 그녀를 후궁으로 데려 갔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비대전군이 태어났다. 정비에게서 아들이 없던 법흥왕은 비대를 차기 왕으로 세우려고도 했지만, 딸 지소와 옥진의 아버지 위화랑 등의 세력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지소를 박영실에게 혼인 시켜 그로 하여금 차기 왕을 잇게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그 뜻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왕위는 지소와 입종(법흥왕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진흥왕으로 이어졌다. 신하의 부인들은 가로챌 권력은 있었지만 차기 왕위의 지명권에 대한 힘은 그리 많지 않은것 같은데서 당시의 남녀간의 사회상과 왕통의 골품인 성골의 신성시를 엿볼 수 있다. 243) 당시 법흥왕의 후궁, 벽화는 당시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21대 소지왕이 변방 날이군으로 순시를 나갔다가 그 지방 파로의 딸이었던 벽화의 미모에 빠져 그 후로도 몇번 왕성 경주에서 현 영주군인 날이군으로 잠행을 하면서까지 찾아가서 만났다. 그러다가 500년 왕궁으로 데려와서 후궁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해 말엽에 왕위가 방계인 지증에게로 이어지면서 많은 의문을 남기고 왕좌에서 내려왔다. 기록은 없지만 정황으로 봤을 때 정변이 있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벽화는 태자로 책봉된 원종(후에 법흥왕)이 차지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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