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견디는 방식(11)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보스톤코리아  2018-10-04, 19:58:59 
내 양심은 나만을 위해 쓰겠다고 작정하고 다짐한 나도 그의 얼굴을 보면 회한이 폭풍처럼 몰려오는데 말이야. 내가 언뜻 말을 비췄더니 너를 존중해서 그러는 거래. 웃겨. 존중은 개뿔, 난 남자들의 속성은 여자보다 단순하다는 것을 알아. 역사적으로 남자가 칼을 뽑을 때는 나라와 여자를 위해서였지. 그가 운동권에서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것도 다 위장된 양심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어. 다 한두 번씩 달려들어갈 때 그는 한 번도 달려들어 가지 않았어. 무늬만 운동권이고 무늬만 사랑인 뭐 그렇고 그런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지.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그의 어떤 잠재되어 있는 모습이 나올 줄 알았어.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지. 헐~그 뒤로 아무것도 없었어. 그가 부르짖던 애국도, 사랑도 그의 무능함과 함께 소멸되었어. 그는 지금 동대문에서 옷 장사하면서 근근이 먹고 살아. 풍요롭게 산 남편은 어떤 줄 아니? 우리같이 이렇게 비비 꼬이지 않았어. 남편은 감정에 대한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더군. 감정의 손실이 경제적으로 양향을 주면 생이 십 년, 이십 년 아니 평생을 그 손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던 부모 밑에서 산 사람들만 사는 일에 쫄아서 눈치보며 사는 거야. 물론 다 그렇지는 않다는 전제 조건이 있지만 내가 운이 좋아서 저 남자를 만난 거야. “  

밖에서 난 화분을 하나 들고 들어오는 남자를 턱으로 가리킨다. 남자가 들어오다 말고 잠깐 목을 숙여 내게 인사를 한다. 나도 얼떨결에 일어나 인사를 한다. 남자는 다부진 몸매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었다. 경쾌한 목소리로 마당을 쩡쩡 울리다가 나갔다 다시 들어 오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은미와 나의 이야기 사이사이에 남자의 목소리가 드나들자 우리의 이야기도 조금씩 목소리도 커지고 빨라졌다. 그는 그렇게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힘을 가졌다.

“저 남자가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니? ‘당신 눈이 이제 허공을 밟지 않는군’ 이러는 거야. 내가 그와 헤어진 뒤에 말이야. 저 사람이 알고 한 말인지 정말 내 눈만 보고 판단한 것인지 알 수 없어. 하지만 상관없어. 알았던 몰랐던 변한 것은 없으니까. 난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었어. 애가 딸린 나이 든 홀아비와 살겠다고 나선 이유는 경제적 풍요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는 것인데 그걸 못하면 내 청춘이 아까워서 어찌 살겠어.

 배짱이 생겼어. 배짱이라는 것이 최악의 경우 이혼을 한다 해도 난 평생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돈이라는 것을 위자료로 받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속에서 비롯된 것이니 내가 얼마나 속물이냔 말이야. 이런 생각 자체, 생각해 보면 얼마나 비참하니? 저 사람 가족들의 요구에 의하지 않고 내 의지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과정에서 저 사람이 죽을 똥 샀겠지만 저 사람 내 치마 잡고 놓지 않더라고. 사랑해서 한 결혼도 아니고 섹스도 뭐 그리 대단하지도 않고 우린 그저 서로의 필요에 의한 계약 관계나 다름 없었어. 그런데 저 사람이 시댁 식구들 다 모인 자리에서 제 마누라 하나 멋대로 살게 해 줄 수 없다면 다 관두겠다고 하는 거야. 난 ok!! 하고 저 사람 아이들에게만은 정말 정성을 다했어. 딱 그거만 내가 저 사람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뭐 돈이 있으니 그런 일들도 다 식은 죽 먹기더라.  애들도 착했고. 내가 말하려는 요지는 결혼의 의무가 사랑에서 시작되기도 하지만 나처럼 필요에 의해 시작되기도 하는데 그것도 꽤 견고하다는 거야. 어느 한 쪽이라도 자신이 필요해서 의무를 성실하게 할 경우에는 그 오래된 관습은 꽤 괜찮은 결과로 이어질 확률이 높지. 덕분에 난 미친년처럼 그림 속에 빠져 살 수 있었어. 저 사람은 나의 아주 훌륭한 물질적 프로바이더였는데 지금은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는 정신적 프로바이더가 된 거야. 간혹 봄 아지랑이같이 순한 마음으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가난하게 살았다면 난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봐. 아마 악지만 남아서 동네 여자들이랑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는 상스러운 여자가 되어 있을 거야. 지금도 좀 그렇지만……”
은미의 자세는 늘 흐드러지게 핀 백일홍 같다. 진한 향기를 풍기고 걷는 걸음마다 꽃잎이 떨어진다. 긴 치마를 무릎까지 끌어올리고 앉을 때 슬쩍 보이던 은미의 허벅지는 아직도 육감적인 냄새가 난다.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거침없이 곁길로 가는 감정을 잘라내고 목표를 위해 행동을 거침없이 옮기는 하루하루의 삶들은 시간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같다.
(다음 호에 계속)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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