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견디는 방식(4)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보스톤코리아  2018-08-13, 10:31:32 
정말 그랬다. 난 은미의 가족에 대해 그 아이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나의 마음 변화 첫 자락에 은미가 있었기 때문에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아이만을 기억할 뿐 정말 은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넌 한 번도 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어. 그냥 너의 무료함 속에 나를 끼워 넣었던 것뿐 이었지.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였을지 몰라.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는 것이지 난 그때 정말 혼자였으니까 말이야."

  은미가 열한 살 되던 해 겨울, 은미의 엄마는 교통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을 했지만 가난한 아버지들의 벌이는 늘 애달프기 마련이다. 일방적인 해고를 당하고 프레스에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된 상태에서는 다른 일자리를 찾기도 힘겨웠다. 은미의 아버지가 다시 찾은 직장은 집을 지어 파는 건축업자 밑에서 운전부터 사무 그리고 집안의 대소사까지 다 챙기는 그 사람의 집사가 되는 일이었다. 돈은 벌었지만 집에 들어오는 날이 일주일에 한두 번 밖에는 되지 않았다. 다리 못 쓰는 엄마와 열한 살 난 딸아이의 생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엄마는 늘 잔소리와 신경질을 달고 살았다. 몸을 못 쓰게 되면서 패악스러워진 엄마 밑에서 엄마의 지시에 따라 살림을 해야 했던 은미가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엄마에게 학교 끝나는 시간을 거짓말하고 나와 만화방에 들려 만화를 보던 그 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우리는 배를 곯더라도 만화는 꼭 봤었다. 난 잊고 있었는데 은미가 말을 하니 기억이 난다. 사수련이라는 아이. 이 아이도 만화방에 오던 아이였다. 이 아이는 매일 쑥버무리를 종이에 둘둘 말아 가지고 와서 나와 은미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은미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지금도 가끔 해 먹는다고 한다. 밀가루를 쑥과 함께 쓱쓱 비벼 소금 조금 넣고 찐 그 맛에 대한 기억을 은미가 찾아냈다. 

“너 시간 있으면 우리 그거 해 먹을까?”
나는 천진하게 사십 년 전에 먹던 쑥버무리를 해 먹자는 은미에게 말없이 동조를 하고 있었다. 은미는 신이 난 듯이 밀가루와 쑥을 갖고 와 소금과 물만 넣고 쓱쓱 버무리는 동안에도 만화방에서 봤던 이야기 중 한 여자애가 끝없이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하다가 그게 잘 못 된 길인 줄 알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줄거리를 한참 이야기했다. 주방으로 가려고 일어서서 두어 발자국 떼다 말고 다시 나를 돌아보고 말한다.
“야 그 만화는 정말 웃겨.  난 그 만화의 주인공처럼 살았지만 마지막에 가난한 남자를 선택해서 진심 어쩌고저쩌고하는 짓 만은 하지 않았어.”  

   은미의 엄마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은미는 6년간의 족쇄를 풀어낸 느낌이었다고 했다. 슬프기도 했지만 마음 한쪽이 후련하게 뻥 뚫려서 눈물은 흐르는데 마음속에서는 깊은 숨쉬기가 되는 듯한 느낌 때문에 자신도 놀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은미가 살 곳을 새로 준비해 준 뒤로는 아예 집을 근거지로 두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또 다른 삶이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은 나보다 엄마가 더 먼저 알아차렸고 엄마는 급격히 무너졌다. 아버지가 온 다는 날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은미는 엄마를 치장 시키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기고 화장을 시키고 곱게 머리를 빗어 내리는 순간 전화벨이 울리면 엄마는 받지 말라고 소리친다. 집에 걸려 오는 전화는 아버지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전화가 온다는 것은 못 온다는 소식 일 수밖에 없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고 계속 머리를 매만지다가 잠이 든다. 처음에는 못 견딜 만한 일들도 자꾸 반복되다 보면 견딜만한 일이 되고 또 내성이 생기면 그러려니 하게 된다. 은미는 그랬다. 그러나 은미의 엄마는 죽는 날까지 그러지 못하고 바상바상한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한탄하다가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 병원에 가보니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퍼진 유방암으로 단 네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렀고 뒤처리도 말끔하게 했다. 그리고 생활환경을 정상인이 살 수 있도록 바꾸고 있었다. 일사천리로 모든 일이 정리되는 것을 보며 아버지가 한 사람의 집안일을 도맡아 한 경력이 이렇게도 쓸모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고 목소리를 통통 튕기며 말하던 은미가 갑자기 눈이 벌겋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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