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36 |
화랑세기花郞世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26) |
보스톤코리아 2018-07-30, 10:22:34 |
신들을 봉안해 놓고 배향했던 신국 신라의 신궁神宮, 5세 풍월주 사다함조에 보면 내물신궁奈勿神宮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다함조 마지막 부분에서 세계世系을 언급할 때 내물신궁이 나오는데 이곳에도 탈자가 다소 있다. 탈자가 있어서 정확한 해독이 불가능하기에 아쉽지만 원문을 인용해 보면, “사다함은 아버지가 구리지仇利知이고 할아버지는 비량比梁이며, 증조부는 비지比知이고, 고조부는 비태比太이다. 비태의 아내 …는 미해공美海公의 딸인데 처음에는 내물왕… … 후궁으로 산황山凰을 낳았다. 실성왕이 명하여 내물…. OO왕이 들어서자, 후궁으로 들였고 나중에 사랑하는 아우에게 내려 주었다. 실O實O… 미해공… 혹은 말하기를 심황心凰은 실상공實相公의 딸이라고도 한다. 눌지왕이 이에 심황에게 명하여 내물신궁의 주主로 삼았다” 위의 인용문을 뒤이어 증조부인 비지에 관하여 계속된다. 그런면을 유추해 보면 탈자부분은 사다함의 고조할머니인 비태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것 같다. 그런데 정확하게 고조모가 산황인지 심황인지 구별이 잘 안된다. 미루어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심황이 내물왕(제17대)의 후궁으로 있다가 다시 실성왕(제18대)이 왕위에 오르면서 실성왕의 후궁으로 산황을 낳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실성왕은 나중에 심황을 자신의 동생에게 주었다. 그리고 난 후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가 제19대왕으로 등극하면서 심황에게 명하여 내물신궁의 제사를 주관하는 신관神官으로 임명하였다(그런데 비태의 아내를 심황으로 보면 관계가 조금 복잡해진다. 미해공은 다른 이름이 미사흔 또는 미사흠으로 내물왕의 3남이다. 즉 눌지왕의 막내 동생이다. 그 미해의 딸이 다시 할아버지 내물왕의 후궁이 되었다는 것과 내물왕과 눌지왕의 재위년도를 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년도의 격차를 보인다. 그리고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미해의 부인은 청아이고, 청아는 박제상의 딸이며 그들 사이에 딸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수리이다. 그래서 원문의 탈자가 많아서 아쉽다. 결국 위의 “혹은 말하기를 심황은 실상공의 딸이라고도 한다” 는 구절이 설득력을 더 얻는다. 심황이 비태의 부인인지 산황이 부인인지, 또는 심황이 미사흔의 딸인지 산황이 딸인지 정확하게 규명할 수 없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심황이 내물신궁의 제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눌지왕(재위 417 ~ 458년)은 내물왕(재위 356 ~ 402)의 아들이다. 둘 다 40년 이상 왕위에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실성왕이 15년간 재위하였다. 실성왕은 내물왕의 사위였다.233) 아마도 눌지가 어려서 실성이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심황은 내물왕의 후궁으로 있다가 그가 죽은 후, 실성왕의 후궁을 거쳐 실성왕의 동생의 부인이 되었다가 눌지가 등극한 후 내물신궁의 제주祭主, 즉 신관神官이 되었다. 이렇듯 화랑세기를 보면 삼국사기의 기록을 뒤집는 기록이 나온다. 현존하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이라면, 즉 필사자 박창화가 일본 왕실도서관 서능부에 소장된 화랑세기 원본을 필사했다면 신궁神宮의 존재는 100여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는 신궁의 설치에 관한 기록이 두 군데 나오는데 하나는 소지왕(제21대, 재위 479 ~ 500년)대로, 또 하나는 지증왕(제22대, 500 ~ 514년)대로 기록되어 있다. 명칭이 조금 달랐을지라도 같은 개념의 신궁이 이미 내물왕 시대에도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즉 박혁거세 사후에 제2대 남해왕이 박혁거세 동생인 아로에게 제사를 주관한 것과 같이, 시조묘의 사당과 유사한 사당들이 모든 왕들을 신주로 봉안하기 위하여 설치된것 같다. 그렇게 여러군데 산재한 사당들을 소지왕대나 지증왕대에 한곳으로 합쳐서 신궁으로 명명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하고 중요한 점은 신궁의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가 모두 여자였다는 것이다. 즉 화랑세기 서문에 나오는 “화랑은 선도다. 우리나라에서 신궁을 받들고 대제를 행하는 것은… 중략 …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로 원화를 삼게 했다” 진흥왕 즉위시 그의 어머니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기 까지는 아마도 원화들은 제주가 되어서 신궁의 제사를 주관하였음이 분명하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 나오는 신궁과 원화의 기록들을 함께 보면 ‘신궁과 원화’를 이해하는 폭이 무한히 확장된다. 233) 내물왕의 아버지는 각간 김말구이다. 왕후 보반부인과의 사이에서 딸 아류부인과 장남 눌지, 차남 복호, 막내아들 미사흔을 두었다. 아류부인이 실성왕의 왕후이며 내물왕의 장남인 눌지가 어려서 사위 실성이 왕위에 올랐으며, 그들은 딸 둘만 낳았다. 장녀 아로부인은 눌지의 비가 되었고, 차녀 치술공주는 박제상의 부인이 되었다(박제상 사후 다시 눌지의 후궁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왕위는 내물왕의 장남인 눌지에게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나무위키,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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