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견디는 방식(1)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보스톤코리아  2018-07-23, 14:28:08 
저기압 전선이 사흘간 꼼짝도 안 한다. 구름으로 꽉 찬 하늘, 습하고 뜨거운 지열을 밟는다. 호모 사피엔스, 그저 맨몸으로 무리를 지어 살 때가 가장 사람다웠던 사람들이 옷을 입고 땀에 젖어 어디론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 걷는다. 좀처럼 땀이 흐르지 않던 내 몸도 이렇게 끈적한 습기와 낮은 기압에는 반응을 한다. 척추를 타고 흥건하게 흐르던 땀이 옷에 밴다. [섬]은 우이동 입구에 있다. 이곳으로 오는 한 시간 반 동안 내내 땀에 젖어 몸에 감기는 옷을 벗고 싶다는 생각과 그 애를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맨몸으로 무리 지어서 사는 인류가 아닌데 이제 모르는 사람이 된 은미의 몸과 마음이 입은 옷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의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거의 사십 년 만에 연락이 닿게 된 것은 학교 졸업생들이 등록만 하면 언제든지 연락이 가능한 핸드폰의 앱 때문이었다. 무심히 그런 앱이 있다는 것을 알고 등록을 한 후 몇 달 간 잊고 있었다. 그저 그 앱의 아이콘만 멀뚱하게 핸드폰에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의 기능이 어떤 것이 있나 이것저것 눌러 보다 앱의 알림 기능을 켜자 나에게 서너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를 기억하고 있고 몹시 반갑다는 메시지들 중 내 기억을 한꺼번에 사십 년 전으로 끌고 들어간 아이의 이름이 있었다. 은미, 그 아이와 나는 5학년 때같이 잘 놀다가 6학년 때 일방적으로 내가 그 아이를 피하면서 친구 관계가 끊어졌다. 은미에게서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엄마는 학교에서 청소를 했다. 난 복도에서 엄마를 만나면 대롱대롱 매달리며 좋아했고 엄마는 뭔가 눈치를 보는 듯 나를 떼어 놓으려고 애를 쓰시곤 했다. 그때는 엄마의 행동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엄마를 만난 것만 좋아서 깡충거리다 교실로 들어가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엄마는 그때 근무 중이었던 것이다. 그때 난 엄마 가방에서 몰래 십 원이나 이십 원을 훔쳐 만화 가게를 가는 게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많은 아이들이 만화방에 몰려들어 좁은 만화방에서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서로 머리를 맞대고 만화에 빠져들었다. 난 엄희자, 송순희의 만화를 좋아했다. 한 반에 육십여 명이 있었던 교실 내의 빈부 격차는 입고 있는 옷과 준비물을 잘 갖고 오는지로 알 수 있었다. 엄마가 학교에서 청소를 했지만 노름만 일삼는 아버지와 아들 셋에 딸인 나를 포함한 여섯 식구가 살아내려면 살림은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옷은 몸만 가릴 수 있으면 옷이고 준비물은 수시로 빌려야만 했다. 그런 생활 중에 내가 엄마의 지갑을 뒤져 십 원이라도 훔치는 것은 엄청난 비행이었다. 모든 비행은 은근한 쾌감을 동반한다. 난 만화를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엄마의 지갑을 뒤져 십 원이나 이십 원을 꺼내는 스릴도 함께 즐겼던 것 같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부모의 그늘을 갖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노는 문화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고, 입는 옷도 다른 아이들의 수준은 그 나름대로 집단을 이루었는데 나는 그 어느 또래 집단에도 끼지 못했다. 한 반에 두서너 명은 또래를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은미는 옆 반에서 외톨이로 있던 아이였다. 나와 은미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게 됐고, 만화방을 함께 가는 친구로 발전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마음 하나가 얼마 후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수준을 가늠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좋아서 강중강중 뛰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저 사람이 그럴듯한 사람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잣대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6학년이 되면서부터는 학교에서 엄마를 보면 슬쩍 몸을 숨기곤 했다. 마음이 조금 비틀려 성장하던 나는 여전히 만화방 출입을 했으나 만화 보는 일에 서서히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국의 단편 소설을 우연히 읽게 된 것이었는데 만화와는 완전히 차별화 된 재미를 본 것이다. 만화방에 가자며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은미에게 난 오늘 돈이 없다고 가기 싫은 핑계를 대면 은미가 대신 돈을 내줄 테니 가자고 한다. 몇 번을 그렇게 심드렁한 채로 만화방을 찾았다. 그래도 이야기에 끌려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만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만화를 열심히 보고 있다가 은미에게 할 말이 있어 고개를 들고 은미를 불렀다. 은미가 왜?라고 대답하는 순간 난 은미의 앞 머리카락 사이에서 움직이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그 뒤로 은미의 머리만 유심히 보았고 은미의 머리카락 속에서 살고 있는 벌레들, 이가 있는 아이와 지금까지 놀았다는 것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몹시 자존심이 상한 것 같기도 하고 내 몸에도 뭔가 기어 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유일한 친구였지만 난 학교에서 피해야 하는 사람인 엄마와 함께 은미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는 은미를 피해 하염없이 수영장 뒤의 철봉대 밑에서 정문을 수시로 내려다보며 은미가 지쳐서 가기를 기다렸다.
다음 호에 계속...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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