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32 |
화랑세기花郞世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22) |
보스톤코리아 2018-06-25, 12:37:43 |
서기 927년 음력 11월 추운 겨울 어느날, 후백제의 견훤이 이끄는 군대가 신라의 왕성인 금성으로 쳐들어 왔다. 그때 포석정에서 왕비와 궁녀 그리고 친척들과 흥청망청231) 놀고 있던 경애왕을 자살케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온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나라 고대사의 정사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지만 신빙성이 떨어져서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음력 11월이면 양력으로 12월이나 1월이다. 연중 일조 시간이 가장 짧고 또한 가장 추운 시기이다. 그 엄동설한에 포석정에서 술잔을 띄어 놓고 이른바 유상곡수流觴曲水을 즐길 수 있었을까? 화랑세기가 출현되기 전까지는 모두가 그렇게 받아드렸으리라…. 경애왕의 마지막 '공식행사'인 이 장면 외에 포석정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또 한차례 등장한다. 제49대 왕인 헌강왕(재위 875~885년)대의 기록 가운데 포석정이 등장한다. “왕이 또 포석정에 행차했더니 남산의 신神이 임금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포석정에 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헌강왕은 여러차례 포석정으로 행차한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조선시대의 문헌에도 기록이 있긴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두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50여년의 시차를 둔 경애왕의 기록은 향연으로 나오지만 헌강왕의 기록은 신神이 출현한다. 음미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화랑세기를 보면서 자세하게 포석정의 기능과 용도를 검증해보기 전에 경애왕의 비극적인 마지막 장면을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요약해 보면, <왕건이 장군에게 명命해 굳센 병사 1만 명을 내어 구하게 했으나, 견훤은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 전인 겨울 11월에 갑자기 서울에 쳐들어왔다. 경애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의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적의 군사가 닥치는 줄도 모르다가 허둥지둥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後宮으로 달아나 들어가고 왕실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 사녀士女 등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 숨었다. 적병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식은 땀을 흘리며 엉금엉금 기면서 종이 되기를 빌었으나 화禍를 면치 못했다. 견훤은 또 군사를 풀어 공사公私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궁궐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 사람들을 시켜 왕을 찾으라고 했다. 왕은 왕비와 첩 몇 명과 후궁에 있다가 붙잡혀 군영에 끌려 왔다. 견훤은 왕을 윽박질러 자살케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그 부하들을 풀어놓아 궁녀들을 겁탈했다. 이에 왕의 족제族弟를 세워 임시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도록 하니, 그가 경순왕이다.> 경애왕은 과연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서 그것도 엄동설한 일조량도 짧은 날을 잡아 왕비와 궁녀, 왕실의 친척과 경공대부 등 수 많은 시녀들을 데리고 나가 야외에서 향연을 즐기고 있었을까? 고려는 국난이 있을때 마다 대장경을 판각하였다. 첫번째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이 잦아지자 1011년 부처의 힘으로 호국하고자 10여년간 판각하였다. 후에 몽골군이 침입했을때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고 다시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1236년에 조판하여 16여년에 걸쳐 완성한 대장경이 팔만대장경이다(국보 32호).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이렇게 국난 중에 탄생되었고, 2007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실적인 면에서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칼이 없으면 막대기라도 들고 나가서 싸워야지 불경을 읽고 목판에 새긴다고 적병이 물러갈 것인가! 그렇지만 군사력이 부족하면 '부처의 힘' 에라도 기대에 백성의 의지를 한곳에 모아 혼란스러운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난을 극복하는 길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924년 경애왕이 즉위했을때 신라는 이미 쇄퇴하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몹시 가난했으며 고려와 후백제의 압박으로 영토는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고려와 동맹을 맺어 세력 회복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대세는 고려로 기울고 있었다. 이에 견훤의 공격을 예견하고 고려의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견훤이 먼저 신라를 점령했던 것이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포석정에는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었다. 여기에는 8세 풍월주인 문노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다. 문노가 누구인가? 격검술이 신기에 달했고 그가 이끌던 화랑도는 호국선護國仙이었으며, 그는 그들의 수장이었다. 이런 여러가지의 기록들을 볼때, 견훤의 침입시 경애왕은 주연을 즐긴것이 아니라 문노 등의 대영걸을 모신 사당인 포석사에 나가서 마지막으로 왕이 할 수 있었던 의식, 즉 나라의 안위를 기원하며 호국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음이 더 설득력이 있다. 경애왕은 이미 견훤의 침공과 고려의 구원병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 자체에서 모순점이 발견된다. 사당인 포석사鮑石祀는 포석정鮑石亭 옆에 있었다. 화랑세기의 기록을 따라가 본다. 231) 흥청興淸은 1504년 조선시대 연산군이 향연을 베풀기 위해 체계적으로 관리한 관기들이다(여기까지는 왕조시대 모든 나라들이 그렇게 했다). 연산군은 조선 8도에 채홍사를 파견해서 아름다운 처녀들을 뽑아서 각 고을에서 이들을 관리하게 하였다. 이들은 운평, 계평, 채홍, 속평 등의 여러 단계로 분류하여 호칭하였으며 가장 뛰어난 기녀들을 '흥청'이라 불렀다. 연산군이 뽑은 흥청은 '천과흥청' 이라고 했다. 문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흥청들과 함께 궁궐에서 주색에 몰두하다가 망한데서 '흥청망청' 이란 말이 생겼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나무위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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