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30 |
화랑세기花郞世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20) |
보스톤코리아 2018-06-11, 11:53:08 |
태자 동륜이 장성했다. 그는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장남이다. 이에 지소태후는 자신의 딸 만호공주를 동륜과 혼인시켰다(만호는 입종갈문왕 사이에서 태어난 진흥왕의 동생이고, 동륜은 진흥왕의 장자이다 – 성골은 이렇게 혼인하여 골품을 이어 왔지만 만호의 아들들은 진평왕을 비롯 백반, 국반 모두 아들이 없었고 진평왕의 딸 덕만이 선덕여왕, 만호의 세째아들 국반의 딸 승만이 진덕여왕으로 성골의 마지막 왕이 되면서 성골은 막을 내렸다). 한편 사도왕후는 미실에게 동륜과 통정하여 아들을 낳으면 훗날 왕후로 삼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진흥왕 역시 미실을 총애하여 미실에게 왕후와 대등한 전주殿主의 지위를 내렸다. 이런 와중에 미실은 자신의 남편 세종에게 공을 세우라고 출정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세종은 문노의 낭도들을 중심으로 휘하의 화랑도들을 거느리고 이사부, 김무력 장군 등을 따라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사이 미실은 진흥왕에게 색공은 물론 설원랑과 자신의 동생 미생과도 색사를 즐겼다. 하지만 진흥왕은 미실의 ‘색사행각’ 을 모른채 원화제도를 29년만에 부활시켜 미실로 하여금 원화로 삼았다. 즉 당시 풍월주였던 남편 세종의 모든 권한을 이어 받아 화랑도를 거느리는 수장이 되었다. 진흥왕의 총애를 받았던 미실의 설원랑과 미생 등과의 색사행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572년 동륜태자가 보명궁주(진흥왕의 후비)의 치맛폭을 풀려고 어느날 밤 보명궁의 담장을 넘다가 개에게 물려 죽으면서 미실과 동륜의 관계가 들통났고 또한 설원랑과 미생과의 관계도 밝혀졌다. 그로 인하여 미실은 출궁되었다. 동시에 원화의 자리도 박탈 당했다. 풍월주 세종이 지위를 회복하는듯 했으나 미실이 남편인 세종에게 같이 물러날 것을 강요하여 풍월주의 자리는 설원랑에게로 이어졌다. 그가 7세 풍월주이다. 이후 사도왕후는 진흥왕에게 미실의 용서를 청하였고, 미실도 눈물로 용서를 빌어 진흥왕은 미실을 다시 입궁하여 옥종공을 마복자로 삼았다(미실이 출궁 당했을 기간에 옥종을 임신했으며 재입궁하여 임신한 상태에서 진흥왕에게 색공을 했다는 뜻이다. 옥종의 아버지는 세종이다). 576년, 진흥왕이 사망하였다. 진흥왕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것이 확실시 되자 사도왕후와 미실은 국정의 중심에서 실권을 잡았다. 여기에는 사도의 오라비 노리부와 미실의 남편 세종이 정치와 군사의 후견인들 이었다(화랑세기에는 노리부와 세종이 다른 인물로 등장한다). 그들은 차기 왕위를 동륜의 장자이며 진흥왕의 장손인 김백정이 아닌 진흥왕의 차자인 금륜태자에게로 잇기로 하였다. 그리고 미실이 왕후가 된다는 각본이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금륜(진지왕)은 지도知道를 왕후로 삼았고 먼저 정을 통하고 왕후의 약속을 받은 미실은 총애를 잃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진지왕은 다른 많은 후궁들과 여색에 빠져 정사를 혼미하게 하였다. 그래서 사도태후는 미실과 함께 노리부와 세종을 앞세워 진지왕 폐위 거사를 단행하였다(579년). 이 당시 화랑도는 문노의 호국선과 설원랑의 운상인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문노의 일문이 진지왕 폐위에 반기를 들까 우려하여 거사 중심세력인 사도와 미실, 노리부 등이 다시 미실을 원화로 세우고 세종을 상선上仙으로 문노를 아선亞仙으로 삼았다. 그리고 풍월주 설원랑에게 명하여 차기 풍월주 자리를 문노에게 넘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평소에 세종을 존경하던 문노가 미실에게도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문노는 미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존경하는 세종의 아내이기에 따랐을 뿐이었다. 문노의 세력을 휘하에 넣은 그들은 진지왕 폐위거사를 도모했으며 차기 왕위에 동륜의 장자 김백정을 제26대 신라의 왕 진평왕으로 등극시켰다. 왕은 어린 나이였지만 중년을 넘기고 있던 미실이 색도色道를 하였으며 그들 사이에서 딸 보화공주가 태어났다. 진평왕 초기에는 사도태후가 섭정을 하였고 미실은 새주璽主가 되었다. 거사의 군사를 지휘한 노리부는 상대등에 올랐다. 어린 진평왕은 할아버지 진흥왕의 후궁들인 미실을 좌후左后에 보명을 우후右后에 임명하였고 그들로 부터의 색도는 계속되었다. 그 후 진평왕 7년인 585년에 미실의 동생인 미생이 10대 풍월주에 올랐다. 이때 하종이 부제가 되었는데 하종은 미실의 아들이다. 하종의 아버지는 세종인데 미실의 첫 연인 사다함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미실은 말년인 진평왕 중기부터 영흥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남편과 정인인 설원랑도 함께 들어 갔으며 여러 남자들과 관계하였지만 그녀는 설원랑을 가장 깊게 사랑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들 사이에서 아들 보종이 태어났는데 그는 후일 16세 풍월주가 되었다. 미실의 죽은 연도는 확실치 않는데 606년에 중병이 들었으며 김유신이 풍월주가 된 612년 까지는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7세 풍월주 염장공조에 보면 612년 김유신이 풍월주가 되었을 때 유신의 외조모인 만호태후가 병에 걸린 미실을 위로하기 위하여 미실의 손녀인 하종의 딸 영모를 김유신과 혼인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미실의 일생이 삼국사기에 조금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소설’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사실적史實的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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