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빛 (5) |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
보스톤코리아 2018-05-21, 13:45:09 |
범인도 잡았는데 살인 동기가 없었다. 그 뉴스를 보며 남편이 계속 몸짓과 쉬운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량은 말 한마디에도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자신의 변화를 연구하다 보니 사람은 단 한마디도 그냥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극복해 보려고 무작위로 읽던 책은 사람들의 행동과 그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것과 사람들이 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를 예측하게 했다. 예측이 맞고 안 맞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 예측이란 머릿속에서 일어나 판단으로 이어지고 기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타인을 향한 행동 양식으로 이어진다. 남편이 왜 애써 이 뉴스를 내게 전하는지를 안다. 조용히, 가만히, 얌전히, 자신의 옆에 있으라는 명령이다. 채소를 가꾸는 철이면 옆집의 백인 할머니도 꽃을 가꾼다. 남편이 없는 날을 잡아 할머니가 나와 있을 때 나가 말을 시켜 보았다. “하이!!” 할머니가 먼저 다가와 묻는다. “말을 할 줄 알아? 어디에서 왔어?” 량은 영어는 못하고 중국에서 왔다고 더듬더듬 말한다. 할머니가 영어를 아주 잘한다며 칭찬을 한다. 할머니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자신은 독일 여자고 영어와 독일 말을 할 줄 알지만 남편이 독일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자신은 독일 말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었으나 남편이 허락하지 않아서 아이들은 독일 말을 못하고 자신도 많이 잊었다 한다. 꼭 중국 말을 잊지 말라는 말도 한다. 량은 미국은 자유로운 국가인 줄 알았는데 중국보다 심한 남녀의 차별이 있었던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현재의 보통 남자들은 여자에 대해 어떤 기준을 갖고 있는지 량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남편의 태도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으니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나이 든 남자들은 남자 우선주의라는 기본적인 뿌리가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남편이 현재 미국에서 어떤 위치의 신분을 갖고 있을 것인지는 쉽게 파악되었다. 남편은 비어있는 옆자리를 미국인 여자가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을 것이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또한 성적인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 중국으로 왔을 것이라는 것, 남편은 미국 여자들은 절대 선택하지 않을 정도로 저급한 수준의 남자라는 것,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저 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견딜만한 모든 일들이 단 한순간도 견딜 수 없어졌다. 량은 다른 운명의 판에 자신의 몸을 놓기 위해 이 남자를 잡았으니 이만한 일은 견뎌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 뒤로 남편이 없는 틈을 타 량은 할머니랑 양지바른 곳에서 늘 대화를 나누었다. 필사적으로 영어공부에 매달렸다. 량은 더 이상 새로운 기억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몇 가지의 기억이 다 인지도 모른다. 충격적인 몇 가지 기억과 싸우는 동안 어쩌면 자신이 그 어린 계집아이에게 다 먹힌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뭇잎 사이로 떨어진 둥글둥글하고 납작한 빛 속에 엎드려 울음을 헉헉 안으로 집어넣던 그날의 기억. 훗날 엄마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짐작되었지만 그건 이미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 시대가 그랬다는 것은 이미 변한 현재에는 이유가 아닌 변명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시대를 변화시켜 왔으니 엄마는 그들에게 동조한 한 사람일 뿐이다. 미국에 온 지 4년쯤 되던 날 량에게 그린카드가 나왔다. 량은 그 카드를 받아들자 모든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얼굴의 근육과 종아리의 근육까지 모두 비온 뒤의 모란꽃처럼 불그스레 물이 오르고 있었다. 량은 그린카드를 꼭 움켜쥔 채 남편에게 영어로 말했다. “나 영어 공부를 해야겠어요. 운전면허 시험도 봐야겠어요.” 남편은 짐작했다는 듯이 오케이라고 말한다. 남편은 안다. 중국의 여자들이 그린카드를 위해 죽은 듯 살다가 카드를 받으면 태도가 변한다는 것을. 아무리 독립을 원해도 영어가 되지 않고 미국의 사회 시스템을 잘 모르면 혼자 독립하는 일은 아주 어렵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공장에 나가 단순노동을 하고 임금은 은행 어카운트로 들어가지만 그것을 관리하는 것은 남편들이다. 자리를 잡고 사는 중국인들과 아무런 교류가 없어 정보를 알 수 없었지만 량의 본능은 고양이처럼 변하고 있었다. 몰래몰래 살금살금 그러다 단 한순간에 쥐를 채가는 고양이처럼 행동했다. 필요한 것은 단호하고 정확한 영어로 단번에 요구하는 것이다. 남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힘들게 사냥한 여자를 그것도 어린 여자를 밖으로 내 보내면 어떤 결과가 올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량같이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던지는 여자는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적 감정을 포기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계속)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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