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18 |
화랑세기花郞世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9) |
보스톤코리아 2018-03-19, 15:21:20 |
6세기 중반, 백제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놓고 공방을 주고 받으며 소모전이 지속되면서 그들의 피로감은 증가되었다. 이 틈을 노린 신라는 120년간 지속되었던 나제동맹(433~553년)의 끈을 느슨하게 하면서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전투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리고 551년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의 상류지역 10군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비옥하고 교통의 요충지인 한강의 하류지역을 차지한 백제에 대해 항상 불만을 품고 이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다가 백제 몰래 553년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에 백제의 성왕은 554년 태자 부여창(후일 위덕왕)에게 관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가야의 군사와 왜의 원병까지 거느리고 참전하였다. 우덕이 지키던 관산성은 함락되었고, 이에 태자를 격려하려고 성왕이 갔다가, 신라의 비장 도도都刀에게 급습을 당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계속 한강 이북의 고구려를 차지했고 가야국으로도 영토를 넓혀 나갔다. 신라는 성왕의 머리를 왕성으로 가지고 와서 신하들이 오르내리는 관청의 섬돌 밑에 묻어두고 많은 신하들로 부터 오르내릴때 밟도록하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이 많은 전투에서 문노는 신기의 격검술을 발휘하면서 휘하의 많은 낭도들을 거느리고 가는곳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지위와 신분으로 인하여 응당한 상급을 받지 못해도 초연하게 도리어 부하들을 위로하였다.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 라면서 덕장이 될 위모를 젊었을때 부터 나타내고 있었다. 이어지는 화랑세기,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자, 친히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소. 청컨대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 주시요” 했다. 말이 심히 간절하여, 공이 이에 굽혀 섬겼다. 세종은 이에 제帝에게 말씀을 드려 이르기를 “비조부의 아들 문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데 여러 번 공이 있었으나 어미로 인하여 영달하지 못했으니, 나라를 위하여 아까운 일입니다” 했다. 제帝가 이에 급찬級찬의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세종은 전군의 신분이었지만 요절한 사다함의 유언으로 그를 이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젊은 문노는 이미 격검술이 신기에 달하였고 낭두로서의 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문화공주는 가야의 왕녀(또는 야국왕이 조공한 여자) 였기에 문노는 골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군인 세종이 직접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문노의 아버지 비조부의 지위와 문노의 역량을 가름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노는 6세기 중반인 당시에, 삼국이 한강유역을 놓고 십수년간 접전을 벌인 전투에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을 도와 참전하여 세운 공을 인정받는 장면이 나타난다. 그리고 임금인 진흥왕이 급찬의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였다. 급찬은 9등급의 지위로 6두품의 신분이어야만 오를 수 있는 벼슬로 문노의 당시 신분은 6두품으로 추측해본다(문노는 나중에 윤궁과 혼인하여 골품을 얻었다. 윤궁은 거칠부의 딸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국보 제3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북한산진흥왕순수비에는 김무력의 전과戰果가 기록되어 있다. 그 비는 555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1260여년간 정확한 비문의 내용도 파악되고 있지 않다가(무학대사비 라고 추측되어 오다가…), 1816년에 금석문 해독의 선구자인 추사 김정희에 의해 판독되었다. 문노는 아버지 비조부가 진골의 가계였지만 어머니가 가야계로 골품이 없었기에 전공에 상응하는 보은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진흥왕이 내리는 벼슬도 마다하였다. 아마 서자로 태어난 고뇌와 서러움을 ‘홍길동’ 보다도 10여 세기나 앞서 체험한 것같다. 문노의 어머니는 당시 인통姻統을 형성하여 비빈을 제공하고 귀족들과 혼인한 진골정통나 대원신통의 인맥姻脈이 아니었기에 그는 골품이 없이 늘 ‘서얼’ 취급을 받았다. 위에 인용한 화랑세기의 마지막 문장, 6세 풍월주 세종이 동복이부 형인 진흥왕에게 말한 내용을 좀더 깊게 살펴보면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작이 아니라는 것이 또한 입증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문노의 활약상이 나오지 않지만, 화랑의 수장인 풍월주의 세계世系와 생애를 다룬 화랑세기를 그 사서들과 교차 검증해보면 도저히 창작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왜 문노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배제되었는지도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유교사상에 젖은 김부식은 골품이 없었던 당시의 문노가 그다지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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