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16 |
화랑세기花郞世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7) |
보스톤코리아 2018-03-05, 10:37:47 |
문노의 아버지인 비조공이 섬기던 박영실이 왕위계승전에서 밀려나게 되자, 그 역시 병부령의 직에서 파직되었다. 540년, 일곱살의 진흥왕이 즉위를 하게되고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실권을 잡았다. 그리고 그해 ‘남모와 준정의 사건’으로 인하여 지소는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세웠다. 초대 화랑의 수장인 풍월주의 자리에 위화랑이 올랐다. 위화랑은 후처인 오도225) 와의 사이에서 옥진과 금진을 낳았다. 당대 가장 미인 중의 한명이었다는 옥진은 동생 금진과 함께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다가 법흥왕이 옥진궁주를 박영실과 혼인하게 하였다. 이런 배경 가운데서 영실공과 비조공은 정쟁에서 밀려난 후 답답한 마음을 서로 위로하며 바둑이나 두면서 묘수를 찾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문노의 출사 길은 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비록 어머니가 가야계라서 골품은 없었지만 병부령까지 지낼 수 있었던 아버지 덕분에 조금이나마 보이던 서광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심신을 도야하고자 무예연마에 더욱 집중하면서 격검술의 달인의 경지를 넘어 신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가야계를 비롯한 민초들의 무리가 그의 문하로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특이 그의 무리 중에는 초택의 미천한 자들도 많았기에 그를 배척하고 비난하는 또 다른 무리들도 많아졌다. 월성의 혈기왕성한 무리들의 충돌을 염려한, 특히 문노의 신변을, 옥진궁주는 이화랑에게 문노를 보호하게 하였으며, 또한 사다함의 스승으로 삼아 모든 화랑도들로 하여금 문노를 공경하고 받들도록 하였다(원문의 탈자로 인하여 아버지인 위화랑에게 요청했는지 이화랑에게 부탁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원문: 玉珍宮主憂之 OOOO花郞保之. 다만 뒤에 이어지는 문장으로 봐서 이화랑에 보호하도록 한것 같다. 이화랑과 옥진궁주는 위화랑의 자녀로서 동부이복 자매지간이다). 이어지는 화랑세기를 보면, [옥진궁주가 …을 근심하여 …화랑에게 보호하게 했다. 이화공이 공을 사다함의 스승으로 삼고 낭도들로 하여금 공경하여 받들도록 했다. 지소태후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공이 “천자에게도 오히려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신하가 있는데不臣之臣, 하물며 선도는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높으니 한 가지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입니다” 했다.] 실권을 잡은 지소태후는 이화랑이 문노를 보호하며 모든 화랑들로 하여금 섬기게 하는걸 이상하게 봤다. 왜냐하면 문노는 병부령에서 파직된 비조공의 아들이기 때문이었고, 그는 병부령 재임시 박영실이 차기 왕위에 오를것으로 예견하고 영실공을 섬겼기에 진흥왕을 왕위에 올린 지소태후는 그를 파직하였다. 또한 인통姻統으로 봤을때 지소 자신은 진골정통인데 반해 옥진궁주는 대원신통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소의 의문에 이화랑이 대답한 내용으로 봐서 당시는 이화랑이 4세 풍월주로 있었던 시기였다. 문노는 아버지의 파직으로 권력은 없었지만 무예를 통하여 이룬 낭도들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문노의 무리는 독자적으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즉 일정한 소속이 없이 대기하다가 필요에 따라 아군을 지원하고 적군을 공격하는 풍월주 이화랑의 ‘별파유군’이었다. 4세 풍월주 이화랑편에 보면 이화랑이 사다함에게 문노를 스승으로 섬기라는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그 내용 중 문노가 이화랑에게 “검은 곧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인데, 어찌 고귀한 사람이 알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했으며, 이에 이화랑이 “한 사람을 대적하지 않으면 곧 어찌 능히 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 아이는 호협을 좋아하니 비록 무리는 많다고는 하지만 그 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네가 그를 보호하라” 고 했던 내용이 있다. 사다함이 문노를 스승으로 섬겨서 격검술을 배웠지만 문노의 500여명의 낭도들은 사다함을 받들었다. 당시 사다함의 나이는 15,6세 였으며 문노는 그 보다 훨씬 많았다. 또한 그들은 사적으로 재종형제(6촌) 사이였다. 그런데 사다함은 진골이었고 문노는 골품이 없었다(그래서 위에서 문노가 사다함을 ‘고귀한 사람’이라고 호칭했다). 이는 신라의 골품이 모계의 인통姻統으로 정해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사다함과 문노는 공히 비지가 증조부이다. 사다함의 조부는 비량(비지와 묘량이 부모)이고, 아버지는 구리지이다. 그리고 문노의 조부는 호조(비지와 조리가 부모)이고, 아버지는 비조부이다. 그런데 6촌지간인 그들의 신분을 결정적으로 갈라 놓은 것이 그들의 어머니이다. 사다함의 어머니는 위화랑의 딸로 법흥왕의 후궁이었던 금진낭주이고, 문노의 어머니는 가야의 문화공주(또는 야국의 공녀)로 어느 인통(진골정통이나 대원신통)에도 속하지 않았으니 골품이 없었다. 그리고 모계로 정해졌던 인통과 골품이었으니 문노는 골품이 없었다. 문노는 후일 윤궁과 혼인하여 골품을 얻었다. 윤궁은 황종(거칠부)의 딸이다. 225) 오도는 선혜왕후(비처왕비)와 중 묘심과의 사통에서 태어났다. 이 사건으로 선혜는 폐비되었고 묘심은 주살당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금갑 사건’의 실제 사건일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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