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15 |
화랑세기花郞世紀, 8세 풍월주風月主 문노文弩(6) |
보스톤코리아 2018-02-26, 10:49:18 |
이어지는 화랑세기, [공은 어려서부터 격검擊劍을 잘 했고 의기義氣를 좋아했다. 가야가 반기를 들자, 사다함이 동행을 청했다. 문노가 말하기를 “어찌 어미의 아들로서 외조外祖의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 했다. 마침내 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 중에 비난하는 자가 있자, 사다함이 “나의 스승은 의인이다” 했다. 가야에 들어가자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주의를 주어 그 뜻에 보답했다. 세종이 풍월주의 지위를 잇자, 그 낭도가 그에게 속했다.] 561년, 가야가 신라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었다. 이에 진흥왕은 이사부에게 명하여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때 15,6세의 사다함이 참전을 요청하였다. 사다함은 당시 가장 뛰어난 화랑도 중의 한명이었다. 후일의 관창과 반굴 등과 함께 신라시대의 화랑를 대표한다. 하지만 진흥왕은 사다함이 어리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그의 간곡한 요청에 왕은 그를 이사부의 귀당비장으로 삼아 종군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수많은 화랑들이 모두 참전하였다. 그리고 사다함은 자신의 재종형이자 스승인 문노, 격검술이 신기에 달해 당대에 대적할 적수가 없었던, 에게도 참전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문노는 자신의 어머니 나라이며 외조의 백성들을 괴롭힐 수가 없다면서 참전을 거부했다. 다수의 화랑들이 문노를 비방했지만 사다함은 스승인 문노의 결정은 옳은 것이며 그는 의를 지키는 사람이니 비방을 중지하고 가야의 경내에 들어가서도 불필요한 살생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사다함은 가야에 도착하여 가장 선봉에 서길 자청하였고 기병 5천을 이끌고 전단문을 급습하였다. 가야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전단량 위에 백기를 세우니 가야군은 완전히 기세를 잃었고, 이 때 이사부가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마침내 가야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온 사다함에게 진흥왕은 많은 상을 하사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및 열전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 화랑세기 5세 풍월주 사다함편 참조). 또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없지만 화랑세기에 실린 출정 전에 연인 미실이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한 ‘송출정가’, 그리고 귀국 후 세종의 아내가 된 미실을 보고 사다함이 읊은 ‘청조가’는 젊은 연인들의 애틋한 ‘참사랑’을 노래한 ‘향가’이다. 우리나라의 향가는 총 28수가 전한다.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고려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 그리고 화랑세기의 2수이다. 균여가 지은 11수의 향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불교를 포교한 내용이며 문학성이 좀 떨어진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리고 도이장가를 향가로 보는데 주저하는 학자가 있기도 하고, 화랑세기의 두 수는 필사본의 진위논쟁으로 그 자체의 인정을 외면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 문학성은 많은 전문가들로 부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어지는 화랑세기, [앞서 호조공이 가야의 일을 잘하여 자주 사신으로 갔다. 비조공 역시 그 뒤를 이었는데, 공을 세워 청화공주靑華公主의 딸인 청진공주靑珍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청진공주가 법흥제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비조공은 요직에 발탁되었다. 그 권세가 칠총신七寵臣과 더불어 막상막하였다. 비조공은 형세를 잘 엿보아 몰래 영실공英失公을 따랐으며 신하로서 섬겼다. 건원建元 2년(537년) 제帝가 장차 영실공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왕위를 넘겨주려 했는데,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비조공을 병부령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 총신 중에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소태후가 정권을 장악하자 비조공을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다. 비조공은 이에 영실공과 더불어 물러나 머무는 곳에서 … 바둑 따위를 두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문노공은 스스로 …이 되어 가야파 일도一徒를 모아 …을 이루었다. … 자가 배척하고 비난했다.] 아들이 없었던 법흥왕은 왕위를 박영실에게로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딸 지소를 박영실과 혼인시켰다. 당시, 537년, 지소는 삼촌인 입종과 결혼해서 아들 삼맥종을 낳았지만(3,4세), 남편은 이미 요절하였기에 과부로 있었다. 그래서 법흥왕의 명으로 박영실과 결혼을 하긴 하였는데 지소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법흥왕은 총신들의 반발을 염려하여 문노의 아버지인 비조공에게 병부령의 직을 주면서 군사권을 총괄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조공은 박영실의 신하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법흥왕을 따르던 칠총신(마복칠성 – 아시공, 수지공, 이등공, 태종공, 비량공, 융취공, 위화랑)의 다수가 박영실의 차기 왕위 계승에 반대하였다. 게다가 지소는 왕후가 되기 보다는 아들 삼맥종을 왕위에 올려 태후가 되는 길을 택했다. 김삼맥종이 제 24대 진흥왕이며 540년에 즉위했다. 즉위 전 몇해의 긴박하게 돌아갔던 왕실의 정쟁을 화랑세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현장감이 살아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가야에 외가를 두고 골품이 없던 문노는 아버지 마저 권력을 잃고 야인이 되자, 더욱 무예 연마에 몰두하면서 그의 격검술은 신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가야계의 무리를 비롯한 초택(민간)의 미천한 무리들도 그의 문하에 들어와서 문노를 신처럼 모셨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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