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2천4백만불 회사 클라리티 파트너스 LLC의 대표 남궁주환 |
도서관 공부대신 자신의 적성인 비즈니스에 더 관심가져 <보스톤코리아 특집> 주류사회 속의 한인들 나와 다른 것, 불편한 것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지도자 |
보스톤코리아 2018-01-25, 20:57:15 |
(보스톤 = 보스톤코리아) 장명술 기자 = 시카고 소재 테크놀로지 컨설팅 회사 클라리티 파트너스 창업주의 집무실 바닥에는 대나무가 깔려있다. 그곳에서 남궁주환 (48, David Namkung) 대표는 ‘뱀부실링’을 발아래 두고 늘 자신을 채찍질 한다. 연 2천4백만불 규모의 매출, 종업원 130여명의 중견 사업체라면 보통 백인 대표를 떠올리기 쉽지만 한인 2세인 남궁씨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남궁연 전 한인회 재관위장 아들이기도 하다. 백년만의 한파가 극성이던 2017년 마지막날 오후 앤도버 소재 남궁연 씨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적절한 크기의 키, 적절한 체구 언뜻 전형적인 한인 2세의 모습이었다. 공부에 많은 취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질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비즈니스였다. 그는 한국의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나는 아빠처럼 리더십이 출중하거나 머리가 좋다기 보다는 누군가 틀을 만들어 놓으면 나는 상품을 만들어 내거나 고치는데 재능이 있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능력도 좋다”라고 밝혔다. 비즈니스 재능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드러났다. 카네기 멜론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은 보스톤 소재 컨설팅 회사 액센쳐(Accenture)였다. 아일랜드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컨설팅 회사에 들어간 1992년 그의 초봉은 2만8천불이었다. 그러나 연봉이 5만불이 됐을 때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뉴욕의 옵션 트레이더로 떠났다. 약 6개월 후 엑센쳐의 파트너가 시카고 프로젝트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달랑 6개월짜리 계약인데 직장을 그만둘 때보다 훨씬 많은 돈을 제시했다. 이 프로젝트는 계속 연장돼 무려 4년 6개월간이나 지속됐다. 매 6개월마다 연봉을 협상해 연봉 인상을 보장 받았다. 이러다 보니 다시 트레이더로 돌아가기는 늦어버렸다. 또한 컨설팅 분야에서 중소 규모 회사를 위한 테크놀로지 컨설팅이 없다는 니치분야를 발견하고 창업에 들어갔다. 장인 사무실의 한쪽 귀퉁이 15평을 빌려 파트너 2명과 함께 시작했다. 이 회사가 클라리티 파트너스다. 그는 소수민족을 위한 프로그램을 통해 주로 시카고 주정부의 계약을 따내면서 회사를 불려나갔다. 현재는 주로 정부쪽의 공공 분야 컨설팅을 많이 하지만 일반 분야 쪽으로 사업분야를 넓혀가고 있다. 남궁대표는 최근 퀸지케피털 파트너스를 만들었다. 회사를 구입해 경영구조를 개선 다시 되파는 것이 주업무다. 그가 이정도 규모의 회사를 일구어 낸 것은 물려받은 재산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손으로 일궈낸 자수성가다. 직원의 50%가 백인인 어엿한 주류사회 속의 비즈니스를 만들어낸 동기와 과정이 자연 궁금했다. “자신이 반대하고 불편해하는 것들도 받아들여야” 아시안들 중에서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닌 진정한 리더가 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이 귀에 척 들어왔다. 그의 삶의 경험에 귀기울여 볼만 했다. 이민자로서 첫발- 인종차별 이 땅에서 이민자의 아들로 그것도 소수민족 중의 소수민족인 한국인으로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차별이란 경험의 시작이었다. 남궁대표는 “우리 세대에서는 아시안 문화의 이해와 수용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막말로 나를 조롱하거나, 아시안으로 스테레오타입핑하곤 했다”고 털어놨다. 이런 일을 당하면 으례 분노하며 맞서 싸우는 것이 아이들의 반응이다. 남궁대표의 대응은 달랐다. 남궁대표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맞서거나 대꾸하기보다, 오히려 성공하는데 집중했다. 성공 그 자체가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좋아한 것은 ‘능력주의(meritocracy)’였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을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실력이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것에 주력했다. 자신이 평가받는데 인종적인 요소 또는 종교, 문화적인 요소가 개입되어서 편파적으로 판단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잘 다니던 컨설팅 회사를 접고 월스트리트의 옵션 트레이더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학교서 중요한 성적, 사회서 중요한 리더십 학창시절의 성적은 학교에 있을 때 중요하지만 결국 사회에 나와서는 성적보다는 리더십 스킬 훨씬 중요하다. 특히 학교에서 리더십은 가르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학교에서) 모든 것은 개별적이다. 배우고, 시험보고, 학점을 받는다. 시험 점수에 신경쓰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 좋은 학점을 받고 또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에 메달린다” 그러나 직장에 다니면 이런 기술보다는 좀더 광범위한 것이 필요하다. 남궁대표는 “아무도 어떻게 사람들을 리드하고, 맨토가 되고, 그들의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아무 곳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결국 스스로 이를 알아내지 못하면 결코 다른 사람을 리드하는 직책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리더십을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어떤 것을 배우고 싶은지 알아야 한다. 리더십도 수학과 영어처럼 시간을 쏟으면서 실력이 늘게 된다. 마음을 열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어느 부분을 발전시켜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점차 나아지게 된다. 아버지에게 리더십 배워 남궁대표는 아버지에게 리더십을 배웠다고 말했다. 아버지 남궁연씨는 뉴잉글랜드 한인회장, 골프협회장, 한인회관건립위원장, 한인회관재산관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최초로 한인회관 건물을 구입해 한인회관을 실현했다. 한인회관이 건립된 배경에는 그의 추진력과 노력이 밑거름이 됐다. 남궁대표는 아버지의 이런 노력들을 잘 알고 있었다. “리더가 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이끄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아버지가 리더 역할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 지 알게 됐으며 그로 인해 단체가 바뀌는 것을 목격하곤 했다. 그의 결론은 한인사회 단체에 단순히 수동적으로 참여만 한다면 할 일이 얼마 없고 물론 그 단체의 회원이지만 결코 단체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코 단순 참여자가 되지 않기로 했다. 무엇을 해도 그 단체를 바꿀 수 있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기로 한 것이다. 제 3의 소수민족 아시안 그는 아시안 기업 경영자로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점이었다고 밝혔다. 남궁대표는 시카고내 소수민족 중 아시안은 제 3의 소수민족이라고 칭했다. 소수민족 비즈니스 프로그램은 수수민족을 균등하게 도와야 하지만 그 안에서도 흑인, 히스패닉 순으로 지원이 이뤄지며 그 다음에야 아시안의 순서가 돌아온다. 유권자 수에서 흑인, 히스패닉이 월등히 많으니 그들에게 우선순위가 먼저 간다. 때로 이들은 아시안들은 이미 잘 사니 도움이 필요 없을 것이라 판단한 이유도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아시안들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정치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시카고는 물론 보스톤에서도 아시안 정치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사회에서도 정치와 사업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아시안은 정계에도, 경제계에서도 서로간에 도움을 줄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뱀부실링”이라 부른다. 남궁대표는 시카고 클라리티 파트너스 자신의 사무실 바닥을 아예 대나무로 깔았다. “항상 아시안에 대한 뱀부실링이 존재한다는 것을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뱀부 실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나처럼 천정을 바닥으로 만들어 버리면 된다”고 말했다. 아시안을 뛰어 넘어야 성장이 가능하다 남궁대표는 “많은 경우 아시안 사람들 사이에서 사업을 키워가는 아시안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아시안들 중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커다란 사업체로 성장하기 위해 비 아시안 사람들 사이에서 리더가 되는 방법을 쉽게 찾아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결코 아시안들만 있는 사업체로서는 크게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시안이 아닌 백인,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사이에서 리더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대형 회사의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더 넓은 폭으로 문화를 받아 들이고 심지어 불편한 수 있는 일도 받아들여야 한다. 혹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할 수 있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 자신의 불편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정말 쉽지 않는 것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인 2세 및 정치인들 적극 도와 코리안어메리칸 위원회(CKA)가 지금은 150여명이 회원으로 있지만 그가 처음 CKA에 합류했을 때는 약 20/25명이었다. 코리안어메리칸 위원회는 미국사회에서의 위상 그리고 봉사활동, 한인에 대한 정체성 등을 심사해 회원을 받아들인다. 우리에게 익숙한 샘윤이 대표로 활동 중이다. 율권, 연방하원에 출마한 대니얼 고 등이 회원이다. 한인들의 권리를 충분히 지켜내고 미국사회에서 한인들을 대변하는 단체가 없다는 공감대에서 만들어진 단체다. 약 40여명의 회원이 있을 때 이들은 샘윤 현 대표를 풀타임으로 고용하는 결단을 내렸다.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그는 “만약 15만불의 연봉을 미국 한인중 가장 성공한 여기 있는 40명이 지불하지 못한다면 이 단체의 미래도 없다”고 설득해 지금은 미국내 한인들 150여명이 회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미국사회가 (인종에 대해) 공정치 않다고 불평만 하는 것은 쉽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불평만 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그가 코리안아메리칸 위원회 활동을 하는 이유다. 그는 얼마전 대니얼고를 시카고로 초대해 2만불의 선거자금을 거둬 전달키도 했다. 사무실 업무, 일과 후 업무 남궁대표는 일주일에 사무실에서 약 40시간을 일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일과 후 일이 주중에는 계속된다. 각종 기금모금 초청, 또는 연사로서 강연 등을 소화한다. 실제로 회사 대표로서의 또하나의 일이다. 직원의 행사, 고객의 행사 참여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일과 후 저녁 일이 즐거운 일만 있지 않다. 할 수없이 가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리더로서 자신의 업무중의 하나”라는 게 그의 인식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에게 가장 어려운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회사의 성장이라고 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 적절하게 회사를 유지만 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 모두가 결국 같은 일만 반복하게 된다. 끊임없이 회사를 성장하게 해야만 더 많은 기회와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게 된다. 더 좋은 인재를 영입할 수도 있다. 그래야 선순환이 계속된다. 어찌보면 강박관념일 수도 있지만 그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네이는 말인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자리가 사람을 말해준다고 하지만 그의 생각이 그의 자리를 말해주고 있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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