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06 |
화랑세기花郞世紀, 7세 풍월주風月主 설화랑薛花郞(13) |
보스톤코리아 2017-12-11, 11:28:51 |
화랑세기 내용의 구리지가 설씨녀, 즉 설화랑의 할머니이며 설성의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이 이어진다(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을 필사한 것이라면 삼국사기 - 제48권, 열전 8권 - 의 ‘가실과 설씨녀의 사랑이야기’는 설성의 어머니와 구리지의 역사적 사건을 신화적으로 기록했을 수도 있으며, 위서라면 박창화가 삼국사기의 그 내용을 참조하여 창작물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부분들의 교차 검증을 통해 봤을 때 필사본이 소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 어머니는 천복賤服을 입고 보리를 찧고 있었다. 맨발을 손으로 가리며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구리공이 가까이 가서 위로하며 그 남편에 대하여 물었다. 목이 메여 울며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절구공이를 적시었다. 한참 후 말하기를 “첩은 나이 16살에 유화로 좋은 낭도를 만나 한번 관계를 가져 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관계를 가질 때 그 낭도가 말하기를 부모에게 물어서 결혼을 하는데 다만 출정을 하면 3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들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첩은 따르지 않고 무릇 14년 동안 믿음을 지켰습니다. 부모 또한 죽고, 모자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했다. 구리공이 말하기를 “너는 아직 나이가 적은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고 스스로 고생을 하는가?” 했다. 그 어미가 말하기를 “30살 된 여자가 가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오직 아이가 자라는 것을 기다릴 뿐입니다”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원년조에 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사로 6촌(양산촌, 고허촌, 진지촌,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의 촌장(알평, 소벌도리, 지백호, 구례마, 지타, 호진)들에 의해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추대하면서 건국되었다. 그리고 사로 6촌은 건국과 함께 6부(급량부, 사량부, 본피부, 점량부, 한지부, 명활부)로 개편되었다. 같은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9년(서기 32년)조의 기록을 보면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각 부에 성을 하사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이 때 명활부를 습비부로 바꾸고 설薛씨 성을 내렸다. 그리고 설화랑의 아버지 설성이 고야촌 호진공의 후손이라고 함은 모계쪽을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설성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화랑도에 속한 낭도였고 어머니 역시 화랑도의 유화였다. 그리고 설성이 구리지를 만나는 장면은 설성이 냇가에서 화랑놀이를 할 때였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은 설성으로 하여금 인생전환이 되는 순간이었다. 구리지는 아버지가 비량공이고 어머니는 소지왕의 후궁인 벽화황후이다. 그들은 측간에서 상통하여 구리지를 낳았다. 그래서 이름이 구리지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들의 상통을 법흥왕이 알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소지왕이 당대 제일의 미녀 벽화를 그리워하여 경주에서 영주까지 잠행을 하면서 만나다가 후궁으로 드렸다. 그리고 지증왕을 거쳐 법흥왕이 즉위한 후에도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다). 그리고 구리지는 법흥왕 사후 후궁이었던 진금낭주와 토함과 사다함 그리고 딸 새달을 낳았다. 독산성 전투에서 구리지가 전사한 후 금진은 설성과 사통하였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설원(설원랑, 설화랑)이다. 설성은 그 후 구리지의 용양신이 되었고, 남색의 관계도 조금 풍기는 내용이 화랑세기에 전한다. 위의 인용문은 구리지가 설성의 안내로 모자가 살고 있는 허름한 집을 방문하여 설씨녀와 만나는 장면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의 모습이 그림과 같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고, 그녀가 ‘미혼모’가 된 사연이 아주 비감悲感스럽게 묘사되어 있다(김태식은 그의 책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 에서 그들의 첫 만남을 “나는 이 장면이야 말로 필사본 중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곳이라고 믿는다. 특히 설씨녀의 한탄은 파토스 Pathos의 극치라 할 만하다” 라고 묘사하였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당시 신라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고 현장감 있게 그려져 있다. 설씨녀가 비록 다 헤어진 옷을 입고 절구공이로 보리를 찧으며 고생하고 있었지만 구리지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녀를 얼굴이 수려하고 살결이 부드럽고 흰것이 마치 먼지더미에 있는 백옥과 같다고 칭찬하면서 찧고있던 보리로 밥을 해오라고 해서 야채반찬으로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 설씨녀를 ‘내 부인吾婦’ 이라고 부르면서 정을 통하려고 했다. 하지만 설녀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남도南桃에서 유화로 있었을 때 만난 낭도와 단 한 번의 정을 맺은 후 14년 동안 수 많은 마을 총각들이 넘보았으나, 그 낭도만을 기다리며 정절을 지켰는데 그럴 수 없다며 거부의 의사를 완곡하게 밝혔다. 무엇보다 설씨녀가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구리지가 한번 정을 통하고 훌쩍 떠나가버리면, 그녀의 의지와 기개가 허물어진 줄 짐작한 마을의 무뢰한들이 모두 손길을 뻗어, 모자母子의 삶은 하루아침에 망가지게 된다며 귀한 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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