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01 |
화랑세기花郞世紀, 7세 풍월주風月主 설화랑薛花郞(8) |
보스톤코리아 2017-10-30, 11:27:53 |
시대는 다시 진평왕의 즉위년인 579년으로 돌아왔다. 커가는 문노의 세력을 염려한 사도태후와 미실은 화랑의 제도를 재정비하면서 미실이 우두머리인 원화의 자리에 오르고, 세종을 상선, 문노를 아선,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우봉사화랑, 미생을 전방봉사화랑으로 삼았다. 화랑도의 내부 분열과 진지왕 폐위에 반발을 우려하여 문노를 아선으로 삼았다. 물론 설원랑이 풍월주였지만 미실은 이미 그가 모든면에서 문노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낭도들로 하여금 문노를 선도仙道의 스승으로 섬기라고 명을 내렸다. 비보랑은 이미 문노의 낭도인지라 별도의 명이 필요치 않았으며, 설원랑과 미생 등 운상인파 낭도들에게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비록 전주(왕후와 비슷한 지위)이자 원화인 미실의 명이지만 운상인의 많은 낭도들이 문노를 스승으로 받드는데 주저하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우두머리인 설원랑이 무릎을 굽히고 문노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모든 무리들이 문노를 신과 같이 섬겼다(원문 이봉문노여신而奉文努如神). 또한 동시에 문노의 낭도들도 설원랑에게 모두 복종하면서 화랑도의 무리는 그 어느때 보다 더 견고히 결속된 조직으로 재탄생하였다. 이에 앞서 문노는 풍월주가 이끄는 화랑도가 아닌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로 스스로 국선이 되어 또 한 무리(一門)의 수장이 되었다. 이는 단지 그가 받은 지위에 대한 불만으로만 세워진 낭도들이 아니고, 신기에 닿은 그의 격검술을 배우러 구름처럼 몰려든 초택의 젊은이들이 있었고, 진지왕 또한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국선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문노의 세력은 기세를 드높이고 있었다. 이 무렵 문노의 입지를 빠르게 간파한 미실은 진지왕을 폐위하려는 자신의 ‘거사계획’에 차질을 빚을까 문노의 세력이 더 확대되기 전에 자신이 화랑도를 장악하면서 문노를 아선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풍월주로서의 역량이 부족한 설원랑을 해임하고 문노를 새로운 풍월주로 세웠다. 이에 처음에 문노는 그 지위를 사양했다. 국선이 결코 풍월주보다 낮은 자리가 아닌데 어찌 스승으로서 아우(설원랑)의 자리를 물려 받느냐면서 거절을 하였다. 하지만 직전 풍월주를 역임한 왕자(전군) 신분의 세종이 사다함의 뒤를 이어 위에 올랐던 전례를 상기시키면서 지위와 나이에 구애받지 말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설원은 다만 전주 미실의 뜻과 명에 따라 화랑도의 임무를 수행했음도 재차 상기시켰다. 결국 문노는 미실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차기 풍월주의 지위를 양위 받았다. 이 내용이 화랑세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미실은 이에 설원랑이 문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문노를 선도仙道의 스승으로 삼는다고 명령을 내리고, 설원랑과 미생 등에게 스승으로 섬기도록 했다. 설원랑의 도徒 중에 불평하는 자가 많았다. 설원이 말하기를 “총주寵主215) 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 하고 무릎을 굽혀 섬겼다. 이로써 문노의 도徒 또한 설원에게 기꺼이 복종했다. 미실이 기뻐하며 그 위位를 문노에게 물려주도록 했다. 문노가 말하기를 “국선은 풍월주보다 아래가 아니고 또한 그대는 나의 아우인데, 어찌 스승으로 아우에게서 받을 수 있는가?” 했다. 설원이 말하기를 “국선이 비록 전왕이 설치한 것이지만 풍월정통은 아니다. 또 세종전군이 왕자의 귀함으로 오히려 사다함공의 뒤를 이었으니 하물며 내가 사형師兄216) 을 받들어 섬긴 것은 미실의 명이 있었던 까닭인데 지금 미실궁주가 다시 양위를 명하는 까닭에 감히 거역할 수 없다” 했다. 문노는 “궁주가 이미 명령했는데, 신臣 또한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이에 문노가 풍월주의 지위를 이었다.] 그리고 8세 풍월주 문노의 취임식 장면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 장면을 감상하기 전에 다시한번 당시 신라에서 사용한 ‘신臣’에 대해서 좀더 고찰해 본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으로 오면서 신은 왕을 대상으로만 사용하였지만 신라시대에는 화랑도의 선임과 후임의 관계에서 까지 넓게 사용되었다. 8세 풍월주 문노전에 보면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었을때 문노가 방문하여 인사를 올리는데 세종이 “나는 감히 그대를 신臣으로 삼을 수 없소’ 라고 했다. 여기에서 직제상으로는 세종이 풍월주로서 위였지만 문노의 나이와 위상, 무엇보다 신기에 이른 그의 검격술과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데 무수한 전공을 세운 그를 감히 신으로 칭할 수 없으니 “나의 형이되어 도와 주시오” 라고 부탁하는 대목이 있다. 또한 문노가 취임식을 할때 원화 미실과 상선 세종 그리고 전임 풍월주 설원랑에게 무릎걸음으로 나가 칭신하는 장면도 있다. 신臣의 개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정확한 시대적인 고찰은 불가능하지만 신의 근원적인 의미는 고찰할 수 있다. “공公에게 봉사하는 이를 신臣이라 하고 가家에게 봉사하는 이를 복僕이라 한다(仕於公曰臣 仕於家曰僕)” 예기 예운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공은 제후이고 가는 대부를 말한다. 이렇게 봉사하는 대상에 따라서 용어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신은 신하로, 복은 노예라는 의미로 그 뜻이 굳어진 것으로 본다. 중요한 점은 신臣에 복僕의 뜻과 임무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215) 총주는 미실을 가르킨다. 216) 사형은 문노를 가르킨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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