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98 |
화랑세기花郞世紀, 7세 풍월주風月主 설화랑薛花郞(5) |
보스톤코리아 2017-10-09, 14:52:30 |
이렇게 두 진영(이문二門)으로 갈라진 화랑도는 ‘풍월주’와 ‘국선國仙’이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다. 풍월주 설원랑(설화랑)이 이끄는 낭도들은 향가를 즐기며 풍취있는 놀이를 잘하였으며, 또한 속진俗塵을 떠나 자연과 함께하며 호흡하며 수신하였다. 반면에 국선 문노가 이끄는 낭도들은 격검술擊劍術 연무하기를 좋아했고 호협한 기상과 용맹한 의협심이 강했다. 그래서 나라사람들은 설화랑의 화랑도들을 ‘운상인雲上人’이라 불렀고, 문노의 화랑도들을 ‘호국선護國仙’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갈라진 화랑도에는 신분에 따라 지원을 달리 하기도 하였다. 골품이 있는 귀족들은 설화랑이 수장으로 있는 운상인으로 많이 갔고, 평민(심지어 많은 미천한 출신의 무리도)들은 국선 문노가 수장으로 있는 호국선으로 많이 몰렸다. 이렇게 진지왕의 즉위 초인 576년 무렵에 갈라졌던 화랑도는 진지왕을 폐위시키려는 정변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사도태후의 명으로 두 무리로 갈라졌던 화랑은 미실을 원화로 복귀시키면서 다시 하나로 되었다. 이것은 ‘진지왕폐위’ 거사를 앞두고 문노의 세력이 불복할까봐 염려하여, 그 거사에 앞서 분열된 화랑도를 먼저 결속시켰던 것이다. 이에 미실이 원화가 되어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미실의 남편 세종이 상선上仙, 문노가 아선亞仙, 설원랑과 비보랑은 좌우봉사화랑, 그리고 미실의 동생 미생은 전방봉사화랑에 임명되었다. 세종은 전임 6세 풍월주였고, 문노는 호국선화랑의 국선이었으며, 설원랑은 운상인화랑의 풍월주였다. 그리고 비보랑은 호국선의 부제였으며, 미생은 운상인의 부제였다. 이렇게 화랑의 수장과 부장들을 제 위치에 적절히 임명하여 군사력을 완벽하게 장악한 뒤 사도태후와 미실은 진지왕을 폐위시켰다. 폐위의 몇가지 이유는 지도왕후를 통해 진골정통과 가까워짐에 위기감을 느꼈고, 또한 왕으로 옹립될 당시 미실을 왕후로 맞이하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정사는 돌보지않고 주색에만 빠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종과 설원랑은 문노의 지원으로 화랑을 장악하여 무력을 확보하였고, 사도태후의 오라비 노리부는 귀족집단을 장악하여 정계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 때가 579년 7월이었고, 죽은 동륜태자의 장남 김백정을 진평왕으로 즉위시키고 노리부는 곧 상대등이 되었다. 세종世宗과 노리부弩里夫, 먼저 삼국사기를 보면, 세종과 노리부는 동일인물로 가야의 왕족이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구해왕)의 장남이다. 532년(법흥왕 19년)에 구형왕이 신라에 귀순할때 함께와서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신라조정에서 대아찬, 파진찬, 이찬 등의 벼슬을 하였다. 그리고 551년(진흥왕12년)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때 거칠부와 함께 참전하여 평양까지 침공하였다. 그리고 죽령 이북의 10군을 정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관상성 전투 당시 백제와의 적대관계에서 또 한번의 큰 전공을 세우면서 가야인으로서 귀화한 진골이었지만 신라조정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세웠다. 또한 578년 진지왕 폐위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진평왕을 옹립한 후에는 상대등이 되었다. 그는 금관가야 구형왕의 장남으로 가야의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망국의 왕족은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귀화한지 46년 후에 드디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재상이 되었다. 그는 그 후 10년을 더 살고 588년에 졸했다. 다음으로 화랑세기를 보면, 세종과 노리부는 동시대를 산 다른 인물로 등장한다. 먼저 노리부, 노리부는 진흥왕의 왕후인 사도의 오라비이다. 만일 그들이 동부동복의 사이라면, 박영실과 옥진이 노리부의 부모이다. 노리부는 사도의 오라비라고만 나오지 부모에 대한 기록은 없다. 576년 진흥왕이 사망하고 사도왕후는 미실과 힘을 합쳐 둘째아들 금륜을 진지왕으로 등극시켰다. 그리고 백전노장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실권은 노리부와 노동弩同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사도태후와 미실, 그리고 세종과 설원랑 등의 화랑도들과 합세하여 주색에 빠진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평왕을 옹립한 후 노리부는 상대등이 되었다. 다음은 화랑세기의 세종, 세종은 6세 풍월주이다. 태종(이사부)과 지소태후(진흥왕의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초명은 의종이었고 숙명공주가 동생이다. 그리고 미실과 혼인하였다. 하지만 미실의 색공과 색사로 568년에 원화를 부활시키자 그는 경외로 다니면서 크고 작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미실은 진흥왕, 동륜태자, 설원, 심지어 동생인 미생 등과 통정을 하였고, 572년 동륜태자의 ‘개사건’ 죽음으로 인하여 그녀의 치부가 드러나자 진흥왕은 노하여 미실을 원화의 자리에서 폐하고 출궁시켰다. 동시에 세종을 불러드리어 다시 풍월주로 화랑도를 이끌게 하였다. 진흥왕은 곧 미실 마저 다시 불러드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종은 미실의 권고로 풍월주를 설원랑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세종은 설원파(운상인)와 문노파(호국선)로 갈라진 화랑를 합쳐 조직을 재정비하는데 일조하였고, 자신은 상선이 되어 화랑도를 장악한 후 진지왕을 폐위하고 진평왕을 옹립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것이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 기록된 세종과 노리부를 요약한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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