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90 |
화랑세기花郞世紀, 6세 풍월주風月主 세종世宗(19) |
보스톤코리아 2017-08-14, 11:42:08 |
576년, 진흥왕이 51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나서 다음 왕위는 차남인 금륜에게로 갔다. 그가 제25대 진지왕이다. 장남 동륜태자가 일찍 죽었기에 차남이 태자의 자리에 있다가 왕좌에 올랐다. 당시 장손인 동륜의 장남 백정이 있었지만 왕위는 차남에게로 이어졌다. 물론 당시 김백정은 어렸다. 동륜이572년에 죽었는데 출생년도가 명확하지 않아 정확한 나이를 알 수가 없는데 그가 죽을 당시 슬하에 자식들이 6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정처 만호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들만 5명이다. 그러니 장남인 백정을 아마도 만 6세에서 12세 정도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충분히 태후 사도가 섭정이나 수렴청정을 할 수 있었을텐데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는 금륜(사륜)에게로 갔다. 여기에는 몇가지 정략이 있었다. 사도태후가 미실과 결탁하여 손자 백정 대신에 차남 금륜을 차기 왕으로 봉하면서 미실을 왕후로 맞기로 하였다. 미실은 이미 진흥왕이 승하하기 전에 다시 왕명으로 입궁해 있었다. 하지만 즉위 후 다른 왕족과 귀족들의 반대여론에 부딪히면서 미실의 꿈은 그만 꿈이 되고 말았다. 또한 진지왕은 즉위 후에는 미실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여인들을 쫓기에만 정신을 쏟았다. 사도태후의 또 다른 이유는 대원신통인 자신의 인맥姻脈으로 왕통을 이어가기 위함이 아닐까 분석해 본다. 장남 동륜의 아들 백정은 장손이긴 하지만 그의 어머니 만호부인은 지소태후의 딸인 진골정통이다. 그리고 차남 금륜의 부인 지도는 사도태후의 자매인 홍도의 딸로 대원신통이다. 그리고 같은 자매의 딸이지만 미실(묘도부인의 딸)을 더 아끼고 사랑했던 관계로 미실을 금륜(진지왕)의 왕후로 맞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모든 정략이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진지왕은 지도왕후를 통해 진골정통인 만호부인과 내통하였고, 설원랑이 이끄는 화랑도인 호국선護國仙과 양분되는 집단인 운상인雲上人 화랑도의 수장인 문노를 지원하는 등 대원신통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자 결국 사도태후는 미실과 함께 오라비인 노리부의 세력을 동원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에 진지왕을 폐하고 장손 김백정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제26대 진평왕이다. 이 정변에서 노리부가 이끄는 군사들은 정계를 장악하였고, 세종은 설원이 이끄는 호국선을 앞세워 화랑도를 접수하였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세종과 노리부가 동일인이지만 화랑세기에는 다른 사람으로 나온다). 그리고 노리부가 상대등이 되어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조모 사도태후도 섭정을 하였다. 이어지는 화랑세기의 내용을 보면, [진흥제가 죽고 금태자가 왕위에 즉위했다. 인하여 미실을 받아들였는데 세상의 여론 때문에 황후로 봉하지 못했다. 또한 다른 사람에 빠져 미실을 심히 총애하지 않았다. 미실은 그 약속을 어긴 것에 노하여 마침내 사도태후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폐위하고 동태자의 아들인 백정공을 즉위시키니, 이가 진평대제이다. 제는 어리고 미실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의 일을 맡았는데, 조정의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세종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결백한 절조를 홀로 지켰다. 비록 미실의 뜻에 따라 출장입상出將入相했으나, 깨끗하여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다. 크게 체모를 잃은 일이 있으면 즉시 미실에게 간언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다. 미실 또한 감동하여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들어 다시 서로 화합했다. 아! 세종공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으며, 황후의 아들로 미실에게 절정을 바쳤다. 스스로 그것을 일생의 일로 삼았다. 평생토록 한사람도 책망하지 않았고, 하나의 소송도 그릇되게 판결하지 않았다. 진실로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眞花郞中花郞也!) 찬하여 말한다: 태후의 사자私子이고 상국相國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청아하고 높은 표상은 화랑의 전형이다.] 512년에 우산국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한 태종 이사부, 김태종의 아들 세종은 어머니가 지소태후이다. 어머니가 남편 입종갈문왕이 일찍 죽은 후 많은 남자들과 정을 통했기에 이부동모의 형제가 많다. 그리고 미실을 보는 순간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잘 다듬어진 교태에 빨려들고 말았다. 진골정통인 지소태후는 미실이 박영실(지소의 계부繼夫였지만 지소는 영실을 좋아하지 않았다)의 자손으로 대원신통이란 인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세종의 간곡한 요청으로 두 사람의 혼인을 승락하였다. 세종은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선두로 출장했다가 평화가 찾아오면 조정에서 정사를 바르게 처리하면서 미실을 든든하게 뒷받침하였다. 그는 오직 부인 미실만을 바라보며 지고한 절조를 지켰지만 미실의 색공과 색사는 늙어서도 어린 진평왕을 모실만큼 그칠줄 몰랐다. 아무리 지순한 세종이였지만 어찌 마음이 홀가분했겠는가!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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