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66 |
보스톤코리아 2017-02-17, 14:08:40 |
화랑의 낭두郎頭, 무관랑이 도망치다가 몸을 던져(사고였든 자의였든) 크게 다쳐서 죽은 월성 밖의 해자, 그 월성 밖의 인공적인 방어시설은 왜 해자(도랑이나 연못)가 아닌 구지(도랑과 연못)으로 조성되었을까? 우리나라 사적 제16호로 지정된 월성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초승달처럼 생겨서 신월성(반월성) 또는 월성이라고 부른다. 임금이 살았기에 재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보면 파사왕 22년(서기101년)에 축조했으며,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가 궁성으로 쌓은 금성에서 월성으로 도성을 옮겼다. 월성은 남쪽으로는 남천南川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절벽 덕분에 인공해자를 조성할 필요가 없다. 성벽의 둘레는 약 1,841m이다. 동서의 폭은 최대가 860m이고, 남북의 최대 폭은 260m 정도이다(내부면적 약 5만5천600평). 아주 거대한 성은 아니지만 주목할 점은 860m나 되는 동서의 고저차가 동의 최고지점과 서의 최저지점의 차이가 최대 약 18m이다. 그래서 월성은 성밖에 도랑(해자)만 파서 물을 채워 돌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군데군데 큰 연못을 만들어 물을 저수하면서 못과 못을 연결하는 도랑을 파서 물을 채웠다(태평양과 서대양의 수위가 다른 파나마운하의 건설방식과 같은 원리이다. 2,000년전 신라인들의 지혜가 놀랍고 그들의 자손됨이 자랑스럽지 않은가!). 그래서 월성의 해자는 화랑세기에 ‘해자(도랑이나 연못)’로 기록되어 있지않고 ‘구지(도랑과 연못)’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화랑세기의 필사자 박창화가 도저히 상상해낼 수 없는 월성의 독특한 구조라고 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박창화가 필사한 일제강점기로 부터 1,300여년 전에 월성의 구지는 이미 매립되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웹싸이트(www.gch.go,kr) ‘월성해자발굴조사보고서 I’(1990), II(고찰, 2006) 참조).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외침의 우려가 거의 없어지고 또한 국가의 융성으로 건축(특히 관청으로 사료됨)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성밖의 구지를 매립하였다. 그래서 전문가가 아니면 월성의 해자가 존재했는지 조차도 상상이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현대에 와서 발굴된 이 구지는 화랑세기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되면서 박창화의 필사본이 진본임을 증명해준다. 월성 주변의 해자 시설 확인 발굴조사는 1984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화랑세기를 필사한 박창화의 필사본은 1989년과 1995년(모본母本)이 발견되었다. 박창화는 1930~1940년대 일본 궁내성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하였을때 화랑세기를 필사하였다. 물론 박창화는 1984년에 시작한 월성해자발굴 사실을 모른다(박창화 뿐만 아니라 사실 아무도 구지의 존재를 몰랐다. 다만 학계에는 해자 존재의 가능성을 인지했기에 발굴을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이미 1962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박창화가 성곽에 일가견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1,300여년 전에 매립되어 택지로 사용되어온 지역에 해자나 구지가 있었다고 단정하여 창작을 한다는 것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성곽에 관한 전문가도 아니었으며 설령 상상된 창작을 하더라도 모든 사서에 등장하는 용어인 ‘해자’를 썼겠지 굳이 ‘구지’라고 했겠는가?(1984년 이전에 월성 주변에 구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한편 지금까지 해자垓子라고 부르던 것을 신라인들은 구지溝池리고 블렀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월성 밖의 보호 시설로 만들어진 이 시설은 실제 구조상 해자보다는 구지가 더 적합한 용어인 것을 알 수 있다. 구지의 기록은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확인해 주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 이종욱,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 63쪽) 결국 이것이 박창화가 화랑세기의 원본을 보고 필사했음을 증명해준다. 우리는 필사본의 진위여부를 논쟁하기 보다는 일본의 왕실도서관 어느 구석에서 빛을 보지못하고 있을 1,400여년 전에 저술된 ‘화랑세기’ 원본을 찾아오는데 전력함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1세 풍월주 이화랑의 딸로 태어나서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던 금진낭주, 법흥왕이 죽은 후 출궁하여 구리지와 혼인하여 사다함 등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구리지가 전사한 뒤에는 설성, 또 설성이 전사한 뒤에는 아들 또래인 미천한 신분의 무관랑을 침소로 불러드려 ‘색녀’로 낙인 찍혔다. 이 금진과 무관랑의 정사情事, 이로 인한 무관랑의 구지로 추락 사고사, 별로 주목받을 만한 사건도 아니었지만 이 사건의 기록은 우리의 역사고증에 크게 두 가지를 증명하고 있다. 첫째는 월성 외벽에 바짝 붙어서 ‘구지(연못과 도랑)’가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는 화랑도의 신분이다. 고위층의 신분만이 아니라 무관랑과 같이 ‘미천한 신분’도 화랑이 될 수 있었으며 뿐만아니라 인품과 능력에 따라 사도私徒를 많이 거느릴 수 있는 낭두郎頭도 될 수 있었다는 사실史實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웹싸이트(www.gch.go,kr) ‘월성해자발굴조사보고서 I’(1990), II(고찰, 2006)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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