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65 |
보스톤코리아 2017-02-13, 15:00:59 |
4세 풍월주 이화랑에 이어서 화랑도의 5세 풍월주가 된 사다함은 부제로 자신의 이복동생인 설원랑을 임명하였다. 그는 당시 13세였다. 설원랑은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낭주가 구리지(사다함의 아버지)가 죽은 후 맞은 남자, 즉 설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설원랑薛原郞은 ‘설화랑’으로 개명하고 나중에 7세 풍월주가 된다. 그리고 이 설성마저 전쟁터에서 죽은 후 금진은 아들 사다함의 부하인 무관랑을 침실로 불러드렸다. 무관랑은 미천한 신분191) 이지만 인망이 있어서 많은 사도私徒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사다함이 풍월주가 될 무렵 사다함 밑으로 오길 자청하였다. 사다함보다 나이가 많고 걸출한 인물이었기에 사다함이 예를 갖추어 무리에 받아드렸다. 무관랑은 사다함의 부하이면서 친구였다. 그것도 그냥 ‘붕우’가 아닌 죽음도 함께하자는 ‘사우死友’의 결의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가야정벌의 전장을 함께 누볐다. 한편 색에 빠진 금진은 무관랑을 매일 침실로 불렀고,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뇌하던 무관랑은 공적으로는 상관이며 사적으로는 친구이자 통정하는 금진의 아들인 화랑도의 풍월주 사다함에게 심경을 밝히고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사다함은 무관랑의 탓이 아니고 어머니의 탓이라면서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통을 도우며 함께 금진의 처소를 출입하였다. 이에 많은 낭도들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무관랑은 금진의 처소로부터 밤에 도망쳐 궁의 담장을 넘다가 구지에 떨어져 크게 다쳤다. 그리고 무관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사우를 잃은 사다함이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하다가 7일만에 죽었다. 그는 풍월주가 되기 전부터 국선國仙이라고 불릴만큼 따르는 낭도들이 많았는데 하루는 지소태후가 불러서, 그 비결을 물으니 “사람을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할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는데 참으로 친구의 몸을 자신의 몸같이 또 친구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과 같이 하였다. 이 ‘미천한 한 화랑도의 죽음’ 사건이 일제강점기 가운데 박창화가 필사한 화랑세기가 위작이 아니고 진본임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담겨있다(물론 필사본 내용에는 수 많은 사실史實이 위작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월성이 여느 성과 다른 형태의 구지/해자를 가지고 있었던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고대의 성곽들은 예외없이 성벽 밖에 도랑이나 연못을 파서 적의 침입을 막았다. 이것을 해자垓字라고 한다. 물론 산성이 아닌 평지나 구릉의 성들은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런데 월성으로 확실한 성벽을 뛰어넘다가 크게 다쳐 죽은 무관랑은 ‘구지溝池’로 떨어졌다. 즉 화랑세기에 해자가 아닌 구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해자는 보통 성벽이 허물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깥 성벽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서 팠다(고구려의 안학궁 또는 중국의 낙양성 등). 그런데 월성의 구지는 발굴결과192) 성곽 외벽 하단부에 바로 붙어서 조성되어 있다. 이것이 또한 독특한 점이다. 그래서 무관랑이 성벽을 뛰어넘었을때 성벽하단부 맨땅에 떨어진 것이 아니고 바로 물이 가득한 구지로 떨어진 것이다. 즉 월성 바깥의 해자는 ‘도랑이나 연못’이 아니라 ‘도랑과 연못’으로 조성된 구지였다. 그럼 왜 월성의 해자는 ‘구지’로 조성했을까? 191) 우리는 그간 삼국사기 등 기존 사서의 기록이나 또는 조금 인용된 화랑세기의 내용으로 신라의 화랑들은 모두가 귀족의 자제들로만 구성된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금진의 남자들인 설성이나 무관랑의 경우를 보면, 미천한 신분도 화랑의 낭두(중상급의 지휘자)가 되어서 자신들 밑에 많은 화랑도를 거느렸음을 볼 수 있다. 즉 화랑도는 귀족의 자식들뿐만이 아니라 평민의 자식들도 될 수 있었다. 무관랑의 경우는 얼마나 낮은 신분이었는지의 묘사는 없지만 ‘미천微賤(보잘것 없이 낮은)한 신분’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설성의 경우는 신분관계로 인하여 금진의 아들들이 의부義父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집(사액과 본장 – 정확한 해독이 어렵지만 본장은 본집, 사액은 임금이 하사한 집일 가능성이 있다)에 들어 가질 않았다. 192) 화랑세기는 김대문이 8세기 초 성덕왕 재위기간(702~737년)에 저술하였다. 그리고 박창화는 일제 강점기에 화랑세기를 필사했다. 박창화는 해자가 있었을거라고 짐작할 수는 있었어도 ‘구지’의 유무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월성의 해자 확인을 위한 발굴조사는 1984년에야 시작되었다. 출토된 유물과 유적을 분석한 결과 월성의 해자는 신라가 삼국(삼한)을 통일한 7세기 말에 그 기능을 이미 상실하였다. 즉 외적의 침입 위험성이 사라지고 건물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하여 매립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서에는 ‘구지’라는 용어가 나오질 않고 다만 화랑세기에서 월성의 해자를 묘사할 때만 나온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웹싸이트(www.gch.go,kr)에 가서 ‘월성해자발굴조사보고서 I’(1990), II(고찰, 2006) 를 보면 지금까지 발굴한 내용을 상세하게 볼 수 있다(방대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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