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58 |
보스톤코리아 2016-12-19, 14:26:34 |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의 호화판 주택 ‘금입택’이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김유신의 종가 ‘재매정택’의 터와 일부는 복원되어 전한다), 계속하여 그 주택의 명칭들로써 위치를 유추해 본다(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 제1장 참고, 김태식, 김영사). 이 금입택들 중에는 강가에 있거나 강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형에 많이 있었다. ‘곡수택曲水宅’은 물이 돌아가는 구비에 있었을 것이며, ‘교남택橋南宅’은 강을 건너는 다리 남쪽에 있었다니 이 역시 강가에 있었을 것이다. ‘장사택長沙宅’은 긴 모래사장을 낀 강가에 있었다고 볼 수있으며, 이 장사택이 위치한 모래사장은 신라충신 박제상(김제상)이 왕의 동생을 구하러 왜국으로 떠난 곳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라 충신 박제상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가장 으뜸가는 충신의 한 명으로 전해오고 있다. 박제상(혹은 모말毛末)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신라 본기 눌지마립간 2년(418년)에 간략하게 실려 있고, 열전에는 상세하게 실려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내물왕과 김제상이라는 제목으로 아주 자세하게 실려 있다. 두 사서의 공통된 내용을 보면, 눌지왕 때 왕이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두 동생을 데려오고자 하였다. 신하들이 삽량주(현재의 경남 양산 지방)의 태수 박제상이 적임자라고 천거하였다. 그래서 박제상은 고구려에 먼저 가서 왕의 동생 복호(삼국유사에는 보해로 나온다)을 데려오고, 다음은 왜국으로 가서 작은 동생 미사흔(삼국유사에는 미해로 나온다)을 신라로 귀국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본인은 왜왕의 분노을 사서 화형을 당했다. 두 사서에서 성이 다르게 나온다. 삼국사기는 박제상朴堤上으로 삼국유사에는 김제상金堤上으로 나온다. 삼국사기가 먼저 쓰여졌고 또한 열전에 가계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시조 박혁거세의 자손이며 파사니사금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이고 아버지는 파진찬을 지낸 물품이다. 상당한 세력가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화랑세기(13세 풍월주 용춘공편)의 기록에 의하면 박제상의 부인 치술이 실성마립간(신라 제18대왕)의 딸인 치술공주로 나온다. 삼국유사(권1 왕력1)에도 실성마립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실주왕實主王이라고도 하고 보금寶金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미추왕 동생인 대서지大西知 각간이다. 어머니는 예생禮生부인으로 석씨이며 등야登也 아간阿干의 딸이다. 왕비는 아류부인이다. 임진년에 왕이 되어 15년을 다스렸다. 왕은 치술의 아버지다.” 여러가지 기록으로 볼때 박제상의 가계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의 성이 박씨라고 사료된다. ‘장사택長沙宅’이 장사 벌지지나 근처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주택의 이름으로 봤을 때 박제상이 고구려에서 복호를 데려오고 나서 가족을 만나볼 틈도 없이 왜국으로 향한 곳이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의 장사長沙라고 했으니 그 근처가 장사택의 소재지였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 경주 남천을 건너는 다리가운데 남산자락에 자리잡은 화랑수련원으로 가는 다리가 ‘화랑교花郞橋’이다. 이 다리 근처 강둑에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 라고 적힌 비석 하나가 있다. 먼저 삼국유사(권1 기이2, 내물왕과 김제상) 를 보면 “처음에 제상이 신라를 떠날 때 부인이 듣고 남편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 이에 망덕사 문 남쪽 모래사장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해서 그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 했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해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오래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치술신모라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다.” 이 작은 하천은 월성의 남쪽 남산 아래를 흐르니 남천이고 월성으로 흘러서 북천과 만나 형산강이 되어서 포항을 거쳐서 동해로 흘러들어간다. 당시 박제상이 왜국으로 갈 때 이용했던 수로이다. 그 남천변에는 예나 지금이나 긴 모래사장이 있다. 그래서 장사이고 ‘벌지지’는 왜국으로 떠나는 남편을 보지도 못하고 목놓아 울다가 쓰러져서 그만 혼절하고 육체적으로 경색되어서 ‘다리를 뻗은 채’ 일어나지 못했기에 벌지지이고 이후로 사람들은 이곳을 ‘장사 벌지지’ 라고 불렀다. ‘장사’ 옆에 있는 망덕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문왕5년(685년) 4월에 건립하였다. 박제상이 왜국으로 갈 때는 물론 없었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는 있었다. 또한 현재는 절터(사적 제7호)만 발굴(1969~1971) 복원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망덕사지의 당간지주(보물 제69호)도 함께 전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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