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참전: 고립주의 외교의 공식적 종말 |
보스톤코리아 2016-12-12, 12:02:24 |
1941년 12월 7일 아침 7시 55분 하와이의 진주만 해군기지가 일본군의 기습 폭격을 당했다. 예측하지 못했던 공습이었기 미국 측의 피해는 엄청났다. 전함 다섯 척을 비롯한 각종 선박들이 침몰하거나 파손되었고, 200기가 넘는 전투기가 파괴되었다. 인명피해도 컸는데 2,400명의 미국인이 사망했고 1,200명은 부상을 당했다. 일본측은 30여대의 비행기와 다섯 대의 소형 잠수함이 파손되었고, 100명 이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미국이, 미국 본토에서, 일본의 기습공격에 거의 일방적으로 참담하게 당했던 셈이다. 바로 다음 날인 12월 8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의회에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하였고 의회는 즉각 이에 화답한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진주만을 기억하라,” 그 한 마디로 미국의 참전은 정당화되었다. 곧이어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미국은 소련, 중국, 영국, 캐나다 등과 함께 반파시즘 연합을 구축했다. 애초에 다소 무모하게 진주만 공격을 감행한 일본의 본래 의도가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로써 미국은 세계 제 2차 대전의 주요 참전국이 되었다. 어쨌거나 좀 미국의 2차대전 참전은 여러모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전쟁은 침체기의 미국 경제를 호황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미국의 참전 결정은 지금까지 미국이 고수해왔던 “고립주의 외교 노선”이 (그후로도 오랫동안) 폐기되는 순간이었기때문이다. 미국은 건국기부터 2차 대전 무렵까지, 대체로 경제적으로는 교류하되 정치, 외교적으로는 간섭하지 않는 미국의 고립주의 외교 노선을 고수했었다. (과거형이다) 그 시작은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1793년 중립주의 선언 (Neutrality Proclamation)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전쟁으로 이어지고,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상태에 돌입했던 때. 독립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1778년의 프랑스-미국 연합 (Franco-American Alliance)의 정신과 의리를 생각한다면 미국은 당연히 프랑스의 편을 들어야 했겠으나 그러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새로 수립된 정부는 그때 우리를 도왔던 “그” 프랑스 정부가 아니야! 실제로는 실리적인 이유였다. 첫째, 프랑스에 동조적인 입장을 취했던 민주공화파와는 달리 정권의 핵심에 있었던 연방파 (Federalists)들은 프랑스의 편에 서는 데에 반대했다. 그들을 지탱하는 북동부 상인들에게 영국은 주 교역대상이었기에, 프랑스와의 동맹 유지란 영국과의 친분을 깨고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 영국이든 프랑스든 영원한 아군 혹은 적군을 만든다는 것은 신생국이었던 미국의 운명을 위태롭게 하는 선택이 될 수 있었기때문이다. 중립주의 외교 노선의 입장은 조지 워싱턴의 고별사에서 한 번 더 강조된다. 그 후로 30년이 흐른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이른바 “고립주의, 불간섭주의”로 정리되는 먼로 독트린을 통해, 고립주의 외교의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신대륙과 구대륙은 서로 다르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간의 갈등에 관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유럽의 문제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도 미국 대륙에 대해 간섭하지 말 것. 또한 미국은 앞으로 유럽이 신대륙에 더 이상의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배격할 것이다.”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은 19세기 내내 미국의 공식적인 외교적 입장이었다. (다만,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은 반식민지주의라기보다는 유럽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데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고 해석해야 옳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미국의 국력이 팽창하고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미국은 서서히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띄게 된다. 이미 유럽 열강들이 전세계를 무대로 힘을 겨루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만 가만히 있는다면 “경쟁에서 도태해버릴 것”이라는 사회 다윈주의적인 시각도 등장했다. 하지만 1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의 주도적인 여론은 다시 외교 문제에 있어 고립주의로 선회했다. “우리는 그 전쟁에 참전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주도적 정서가 대두했던 탓이다. 특히 1930년대의 경제 대공황은 고립주의 정서를 더욱 강화시켰다. 1930년대 중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이 등장하고 유럽의 정세가 불안정 할 때 미국은 교전중인 국가로의 여행 금지, 금전 대여 금지, 무기 판매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중립법 (Neutrality Acts)를 내놓음으로써 고립주의 외교의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 결과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지원했던 파시스트 프랑코파의 쿠데타가 민주주의를 무력화시켰던 1937년 스페인의 내전에서도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히틀러로 하여금 미국은 유럽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힌트로 작용했다. 1939년 9월 독일이 체코와 그리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2차 대전의 시작이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기존의 중립법을 수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1939년 수정된 새로운 중립법은 군수품을 수출하는 것까지 허용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하지만 “Cash & Carry”라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배달과 외상거래로 인한 잠재적 위험을 제거 했다. 루즈벨트의 은유적 연설처럼 이제 미국은 “민주주의의 무기고 (the Arsenal of Democracy)의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으로서는 실익도 있었다. 군비 수출로 인해 경기가 회복되었고, 긴 불황은 끝이 나고 있었던 탓이다. 1940년 루즈벨트가 4선에 성공하자 루즈벨트는 더욱 적극적으로 연합국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얼마 후 발생한 진주만 침공과 미국의 참전은 미국이 자연스럽게 중립주의, 고립주의 외교 노선을 폐기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패권국가 미국의 한 출발점이다. 보스톤코리아 칼럼리스트 소피아 소피아 선생님의 지난 칼럼은 mywiseprep.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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