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54 |
보스톤코리아 2016-11-21, 13:48:49 |
이번에는 사다함의 아버지 구리지와 그의 용양신 설성에 관하여 좀더 자세하게 살펴본다. 화랑세기에서는 단 세 차례 용양군 또는 용양신이란 용어가 등장한다(2세 풍월주 미진부전에 법흥왕과 박영실의 관계, 5세 풍월주 사다함전에 그의 아버지 구리지와 설성의 관계, 그리고 7세 풍월주 설화랑전에 같은 사람들인 구리지와 설성의 관계 – 세 군데 나오지만 법흥왕과 박영실 그리고 구리지와 설성의 이야기다. 또한 여러곳에서 남색을 연상케하는 관계들이 있지만 직접적으로 언급한 곳은 없다). 앞뒤의 문맥으로 보아 충분히 남색을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심복이나 대리인 정도로도 쓰이고 있다는 견해도 많이 있다. 그럼 용양이란 무엇(누구)인가? 용양은 춘추전국시대의 7웅 중의 하나인 위魏나라 안리왕의 총신으로서 총애의 원천은 바로 남색이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용양군 또는 용양신은 남색으로 주인이나 상관을 받드는 인물의 대명사로 쓰여 왔다. 이 용양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 전한시대의 학자인 유향이 전국시대의 유명한 책사나 모사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모아 편찬한 ‘전국책戰國策’ 가운데서 위나라에 관한 위책魏策에 나온다. 간추린 내용을 보면, <어느날 위나라의 안리왕과 함께 낚시를 한던 용양군이 고기 십여마리를 낚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무슨일이냐고 물으니, 용양군이 “제가 낚은 고기가 꼭 저를 닮은 듯해서 그만 울음이 나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왕이 재차 물으니, “제가 처음 고기를 잡았을 때는 그 기쁜 마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큰 고기들을 잡자, 그만 앞서 잡은 고기를 아끼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잘 생기지도 않은 저 같은 이가 총애를 입어 임금님 잠자리를 돌볼 수 있었습니다만, 앞으로 천하의 미인들이 줄을 이어 모이면 저는 낚시에 걸린 저 물고기처럼 음식으로 요리될 날만 기다리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그런 생각에 그만 눈믈이 앞을 가렸습니다”>. 위의 용양이 여자라고 생각되기도 하겠지만 그는 분명 남자였다. 그리고 안리왕 역시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이 이야기로 비롯하여 어떤 남자를 용양군(또는 용양신)이라고 하면 그가 곧 남자를 위해 성적으로 봉사하는 인물이라는 의미의 대명사로 쓰이게 된 것이다. 법흥왕과 박영실 그리고 구리지와 설성 등을 대표적으로 화랑세기에는 남색 냄새를 풍기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의 남색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모두 양성애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부인 등 많은 여인들이 주위에 있었다. 그렇지 않고 신하(또는 심복) 가운데서도 일반적인 충신 이상의 사사로운 업무의 처리 담당했던 대리인이었기에 상징적으로 주어진 명칭으로도 볼 수 있다. 동성애나 양성애를 ‘선택’으로 보는 보수측과 ‘천성’이라고 보는 진보측으로 나누어져서 대립하는 가운데 선진국들을 필두로 하여 사회적은 물론 법적으로도 수용과 인정으로 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속에서도 낮설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부분이 동성애 관계이다. 대표적인 남자로는 신라 36대 혜공왕, 고려 7대왕 목종과 31대 공민왕이며, 여자는 세종대왕의 며느리 순빈 봉씨187) 이다. 187) 순빈봉씨는 조선의 제 5대왕 문종이 세자 시절의 두 번째 빈이다. 문종은 여러면에서 대단히 불행한 왕이었다. 세종대왕의 장자로 태어나서 왕위에 올랐지만 ‘처복妻福’은 없었다. 문종, 이향李珦은 8세에 세자에 책봉되었고 일찍 결혼하였다. 첫 번째 부인 휘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으려고 온갖 잡술을 행하가다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 순빈봉씨는 과음과 폭력적 기질 및 동성애 문제로 폐위되었다. 폐위 후 친정 아버지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봉씨는 나인 소쌍과 동성애를 나누었으며, 소쌍이 단지(승휘 권씨의 나인)와 동성애로 놀아나는 것을 투기하여 또 다른 나인 석가이를 시켜서 미행/훼방하기도 하였다. 결국 모든것은 발각되었고, 세종대왕은 수치와 진노를 참으며 며느리를 유도질문하여 모든걸 밝히고 폐위하였다. 세 번째 아내는 후궁 중의 한 명인 승휘 권씨를 맞이하였다. 그녀는 1441년 단종을 낳은 지 3일만에 산고로 인하여 죽었다. 나중에 현덕왕후로 추승되었다. 그 후 문종은 정식으로 빈이나 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많은 후궁들 가운데 몇명으로 부터 후사가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순비봉씨 사건의 전말은 세종실록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있다. 세종18년, 1436년).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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