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미국 대통령 선거의 잡다한 역사 (2)
보스톤코리아  2016-10-17, 11:26:14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와 음담패설을 하는 내용이 담긴 녹음 파일이 공개되면서, 공화당의 주요 의원들 상당수를 포함한 많은 공화당 인사들이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거나 유보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사실 트럼프의 지지그룹 사이에서 그의 인기 요인은 일베급의 ‘막말’이었다고 느껴질만큼, 대선 레이스 내내 특히 이민 문제와 여성에 관한한 ‘퀄리티 떨어지게시리’ 막말을 쏟아내던 그이다. 공개된 녹음 파일 속의 트럼프는 혐오스럽고 역겹지만, 우리가 모르는 충격적이고도 새로운 트럼프의 모습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니 공화당 정치인들이 선거 한 달 전 소속 정당의 후보에 대한 지지를 줄줄이 철회하는 데에는 각자의 중간 선거에나 힘쓰자는 실리적인 판단도 있었겠지만, 공화당 내의 정체성 혼란과 내부 분열이 이미 임계점에 달했던 탓도 있을 게다. 음담패설 녹음 파일 덕분에 자당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접어도 덜 욕먹을 타이밍을 잡았을 뿐. 

1884년 선거, 민주당 승리의 일등공신이 된 공화당 개혁파
현재의 선거판은 어딘지 1884년 선거를 떠올리게 한다. 남북전쟁 발발 직전 치러져 에이브러햄 링컨을 당선시킨 1860년 선거에서부터 1908년 윌리엄 태프트가 선출되기까지 무려 반세기 동안 치러진 열 세번의 선거동안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선출된 것은 1884년과 1892년 딱 두 번이었는데, 그 두 번의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당선되었다. 

1884년 선거 당시 공화당의 후보는 제임스 블레인이었다. 1884년 선거도 (2016년 선거보다야 훨씬 낫겟지만) 정책보다는 인신공격성 상호 비방이 난무했던 선거였다. 클리블랜드는 ‘혼외 자식’이 있다는 의혹과 함께 “엄마, 아빠는 어디 있나요?”라는 네거티브 공세에 시달렸으나 대권을 거머쥐었다. 상대당 후보인 블레인을 지지하는 개신교 목사가 민주당의 뿌리가 “Rum, Romanism, Rebellion”에 있다고 비방함으로써 민주당의 주요 지지 세력인 남부와 아이리시계 카톨릭 등의 거센 반발을 샀는데, 그 반사 이익을 가져간 것은 클리블랜드였다. 또한 블레인의 부패를 문제삼고 민주당과 손 잡았던 공화당 내의 개혁 세력<머그웜프 Mugwumps>의 반란표 역시 팽팽했던 대선에서 클리블랜드의 당선에 공헌했다. 

1880년 대선과 가필드 대통령 암살 사건 
1884년 이전에 치러진 1880년의 선거때도 공화당의 계파갈등 문제가 수면 위로 불거졌었다. 당시 공화당에는 뉴욕주 상원 의원 로스코 콘클링이 이끄는 건장파 (Stalwart)와 메인주의 상원의원이었던 블레인을 중심으로 하는 잡종파 (Half Breeds)의 두 계파가 갈등하고 있었다. 1880년 선거를 앞 둔 상황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인물은 잡종파에 가까운 제임스 가필드였다. 나름 개혁적인 인물이었지만 선거 자금이 부족했던 가필드는 상대 계파의 수장인 콘클링의 도움이 필요했다. 콘글링은 가필드를 지원하면서 건장파 소속 체스터 아서를 부통령으로 지명할 것과 건장파 인사들을 내각에 등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1880년의 선거는 매우 박빙이었고, 선거 결과에서도 가필드가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다. 그러므로 만약 콘클링의 지원이 없이도 가필드가 민주당의 윈필드 행콕에게 승리하기는 힘들었을 상황. 당연히 콘클링이 이끄는 건장파의 공화당내 정치적 입지는 커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가필드가 대통령이 된 후 공직자 부패 청산을 추진하려니, 개혁의 걸림돌이었던 콘글링 계파의 인사들을 내각에 등용하는 데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건장파가 반발하면서, 공화당의 최대 계파가 공화당 출신 대통령 가필드와 갈등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갈등은 대통령 암살이라는 비극을 가져왔다. 모교인 윌리엄스 대학에 방문하기 위해 열차 플랫폼에 들어서던 가필드 대통령은 한 사내에게 총격을 받고 쓰러져 사망하게되는데, 그 총격범은 바로 건장파 소속의 찰스 기토라는 인물로 고위 공직을 얻지 못한 탓에 가필드에게 앙심을 품고 암살을 단행했다고 한다. 기토가 가필드 대통령을 저격한 후 외쳤던 말은 희비극이다. “가필드가 죽었으니 이제 다음 대통령은 아서다.” 공화당-건장파가 대통령이었다면 기토가 고위 공무원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토는 부통령으로 아서가 대통령직을 승계하도록 ‘도왔을’ 뿐, 대통령 암살범으로 끝났다. 그래도 가필드가 추진하려던 개혁은 아서가 이어갔다. 

우드로 윌슨의 어부지리,1912년 선거
공화당 내부 분열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선거 판도를 바꾼 것은 1912년 대선이지 싶다. 1901년,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매킨리가 암살당했다. 개혁파로 당내에서는 아웃사이더였던 시오도어 루즈벨트가 매킨리의 대통령직을 승계했는데, 루즈벨트는 1904년 선거의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어쨌거나 재임기간 루즈벨트는 19세기 후반의 고질적인 부패와 독점 문제를 개혁하려던 움직임인 혁신주의 (Progressivism)를 정치에 도입했던 인물이다. 루즈벨트의 후임대통령은 윌리엄 태프트였는데, 혁신주의자들이나 전임 루즈벨트 대통령은 태프트가 혁신주의의 노선을 이어가기를 희망하면서 태프트를 지원했다. 그러나 태프트 대통령의 관세, 자연 보호-개발 정책등이 전임 루즈벨트와 다른 노선을 걸으면서 갈등하게 되었다. 1910년, 루즈벨트는 또 한번 대권도전의사를 펼쳤으나 공화당 후보로 지명된 이는 현직이었던 태프트였다. 루즈벨트는 공화당 내의 지지자들과 함께 혁신당 (Progressive Party)을 창당했고 1912년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루즈벨트의 분당 덕분에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은 19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계속)


보스톤코리아 칼럼리스트 소피아
소피아 선생님의 지난 칼럼은 mywiseprep.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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