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33 |
보스톤코리아 2016-06-06, 12:14:48 |
이어서 삼국유사(제2권 기이편)에 나오는 무왕조의 원문을 인용한다. “무왕(고본에는 무강이라 하였으나 그릇된 것이니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과 동교하여 장을 낳고 아명을 서동이라 하였는데 그는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에 의하여 ‘서동’이라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가서 마를 가지고 동네 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을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두고 맛동도령을 밤에 몰래 만나러 간다네.’ 동요가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알려지니 백관이 임금에게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는데 장차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처로 갈 때 서동이 도중에 나와 맞이하며 시위하고 가고자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여 따라가며 정을 나누었다.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음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왕후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공주가 가로되 이것은 황금이니 가히 백년의 부를 이를 것이다 했다. 서동이 말하길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곳에 황금을 흙과 같이 쌓아놓았다 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가로되 그것은 천하의 지보니 그대가 지금 그 소재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하여 금을 모아 구릉과 같이 쌓아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수송할 방책을 물었다. 법사가 가로되 내가 신력으로써 보낼터이니 금을 가져오라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주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공경하게 예를 갖췄다. 부인이 왕에게 이르되 나의 소원이 이 곳에 큰 절을 이룩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것을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어서 미륵삼존상과 회전(법당), 탑, 낭무(회랑)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액호를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한다)라 하니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서 도와주었는데 지금까지 그 절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를 법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독녀의 아들이라 전하니 자세히 알 수 없다)” 백제에서 마 캐던 서동이 신라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의 한명인 선화공주를 부인으로 얻은 삼국유사의 내용이다. 이렇게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미륵사는 639년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무왕(재위기간, 600~641년)이 세운것이다. 현재는 절터(사적 제150호)만 남아 전하고,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과 복원된 동탑, 목탑이 있었던 터와 당간지주(보물 제236호) 등이 전한다.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또한 7층이나 9층으로 추정되는 동양 최대의 석탑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석탑의 시원형식으로 귀중한 문화재이다. 서쪽면 전체와 남쪽면의 대부분, 북쪽면의 절반 정도가 무너지고 6층까지 밖에 남지 않아서 현재 보수 중이다. 일제강점기(1915년)에 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시멘트를 발랐다. 미관상 안좋고 추가 붕괴의 우려가 있어서1999년 해체보수정비를 결정하여 진행하고 있으며 2017년에 완료될 예정이다. 2009년1월14일, 심주心柱 상면上面 중앙의 사리공에서 ‘금제사리호, 금제사리 봉안기’ 를 발견하였다.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cm, 세로10.5cm 크기의 금판에 음각으로 붉은 칠을 해서 글씨가 잘 보이도록 했다. 전면에 99자, 후면에 93자가 기록되어 있는 사리봉안기는 문헌이 한정된 고대사 연구에 대단히 귀중한 금석문이다. 백제 황후가 재물을 희사해 절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으로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또한 시주자인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사씨 또는 사택씨는 백제 8대 귀족성 중의 하나다)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상이하다. 1,400여년만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의 기록이 지금까지 가르치고 배운 내용과 다르기에 전문가들의 많은 연구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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