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19 |
보스톤코리아 2016-02-29, 11:19:12 |
이어지는 화랑세기의 대역본(이종욱), [지소는 보도왕후의 딸로 입종공의 부인이 되어 진흥대왕을 낳았는데, 법흥대왕이 옥진궁주를 사랑하여 진흥대왕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할 뜻이 없었기에, 지소는 걱정이 되었다. 위화랑이 이에 대의로써 옥진을 깨닫게 하여, 진흥을 왕으로 삼게 했다. 그 때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써 사도태후 또한 무사했다. 위화랑공의 덕이 컸다.] 지소는 법흥왕과 보도왕후 사이의 딸이며 삼촌인 입종과 결혼했다.168) 그리고 후일 신라의 국토를 확장하고 중흥시키는 걸출한 진흥왕을 낳았다. 하지만 김삼맥종(진흥왕)이 왕이 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먼저 법흥왕과 정비인 보도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적자가 없었다. 그리고 수 많은 후궁들이 있었지만 아들은 두명 뿐이었다. 장남은 옥진궁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비대공이고, 차남은 보과공주에게서 태어난 모랑공이다. 옥진은 위화랑과 오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법흥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보과공주는 부여씨로서 백제 동성왕의 딸이다. 법흥왕이 옥진을 지극히 사랑하는 관계로 왕위를 옥진의 아들인 비대전군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래서 지소는 왕위가 후궁의 자식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지증왕의 적손인 자신의 아들로 잇게하려고 많은 정치를 하였다. 특히 남편 입종이 죽고 없는 가운데서도 왕위를 어린 진흥에게로 잇게한 그녀의 정치적인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위화랑은 법흥왕의 후궁 옥진이 자신의 딸이기에, 지소의 뜻과 왕궁내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옥진을 설득하였다. 즉 의義를 위하여 사私를 버린 위화랑의 현명한 판단은 신라를 중흥시키는데 디딤돌이 되었던 화랑도의 수장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왕궁 대부분의 사람들이 왕위가 진홍왕에게로 이어짐이 대의라고 보았지만, 그 대업이 결고 간단치만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이로써 사도태후思道太后 또한 무사하였다. 以此思道太后亦無事이차사도태후역무사” 라는 문장은 예사롭게 넘어갈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당시의 왕위쟁탈전에서 진흥이 아니고 비대공에게로 넘어 갔다면 지소를 필두로 김삼맥종을 옹립하려 했던 무리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태후 박씨 부터 시작되어 왕실에 왕비를 공급한 대원신통의 계통은 없었을 것이다. 이 사도태후 또한 비대공과 같은 어머니인 옥진의 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옥진의 첫남편 박영실朴英失이고 비대공과는 아버지가 다른 오누이다. 사도가 진흥왕과 결혼하는 것을 진흥의 어머니 지소는 반대했다. 그것은 아마도 왕실에 왕후와 후궁을 공급하는 계통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김씨 지소 역시 왕실에 왕비를 공급했던 또 하나의 계통인 진골정통의 시모始母이다. 그 후 신라 왕실의 왕후와 후궁들은 모두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 의한 두 계통에서만 공급되었다. 즉 진골정통은 지소태후의 딸들과 외손녀들 그리고 그들의 딸들로 이어졌고, 대원신통은 사도태후의 딸들과 외손녀들 그리고 그들의 딸들로 이어졌다. [위화랑의 자손은 매우 많았다. 장녀인 옥진궁주와 차녀인 금진부인은 곧 오도부인이 낳았다. 옥진은 처음에 영실공에게 시집 갔으나, 얼마 안 있어 법흥대왕의 사랑을 받아 비대공을 낳았다. 대왕이 비대공을 태자로 삼고자 하자, 공이 그것을 말리며 말하기를 “신의 딸은 골품이 없고 또 영실과 더불어 함께 살았으니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했다. 법흥이 죽자 지소태후가 비대공의 왕자의 지위를 낮추어 공사公祀를 받들게 했다. 비대공의 딸인 개원궁주는 동륜태자를 섬겨 아들을 두었다.] 168) 후대의 사가들 뿐만 아니라 뭇사람들로 부터 진성여왕과 함께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고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지소태후는 정식 남편만 4명이나 두었다. 첫째 남편 입종 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으로 진흥왕을 낳았다. 그들의 딸 만호태후는 동륜태자의 아내이며 진평왕의 어머니다. 둘째 남편 태종 이사부와는 세종전군(제6대 풍월주)을 낳았고, 딸 숙명궁주는 동복 오라비 진흥왕의 후궁이 되었다. 그리고 아들 이차돈이 있다.(최초의 순교자로 이름을 남긴 이차돈이 아니다) 그리고 세째 남편이 박영실이다. 옥진궁주의 첫남편인 그 박영실이다. 지소는 박영실을 좋아하지 않았고 법흥왕의 명에 따라 계부繼夫로 맞이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송화공주가 진평왕의 왕후인 마야부인이다. 그리고 네째 남편이 구진인데, 구진은 침신枕臣으로 불린다. 즉 지소가 박영실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만 남편이었고, 또 다른 남편 구진을 들려서 지소의 성생활을 만족시켰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 보명궁주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의 후궁이 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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