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11 |
보스톤코리아 2015-12-28, 14:56:32 |
물론 소지왕(신라 제21대, 재위 479 ~ 500)의 죽음이 자연사이고 또 일각이서 보듯 왕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벽화와의 사랑에만 빠져있다가 왕위에서 쫓겨났다면 그만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당시 신라는 왕실 내부와 주변국과의 국제정세가 복잡하였다. 사실 소지왕은 고타군古陀郡 노파의 충고를 제외하면 임금으로서 정사를 소홀히 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는 재위 22년 동안, 벽화를 만나기 이전까지, 별로 흠잡을 때 없는 정사를 펼쳤다. 재위기간 거의를 전쟁으로 보내야 했던 관계로 성의 축조와 보수 그리고 군사정비에 많은 인력을 동원하였다. 재위 초기부터 말갈족의 침입을 시작으로 고구려와 왜의 침공이 끝이질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9년(487년)에는 시조왕 박혁거세가 처음태어난 곳인 나을에 신궁을 건설했다. 그리고 도로를 정비했으며 지방(일선군)에 행차하여 빈민을 구제하였고, 또한 사형수를 제외한 대대적인 사면도 하였으며, 하는 일이 없는 백성들을 모아서 집단적으로 농사를 짓게 했는데, 이 정책이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실업자 대책이었다. 또한 월성에 시장을 개설하여 물자를 유통시켰는데 이 역시 최초의 자유시장 개념의 경제진흥책이다. 인류의 역사는 어느 지역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평화기’보다는 격변의 시기가 더 많았다. 소지왕이 재위했던 5세기 말 반한도의 정세는 그야 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김씨 왕실의 세습을 이어가기 위한 내실을 다져야 했고, 대외적으로는 특히 정복군주 고구려 장수왕(394 ~ 491, 재위기간 412 ~ 491)의 남침을 막아야했다. 삼국사기 소지왕편에는 고구려와 관계된 기록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소지왕 때 고구려의 집중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변화된 대고구려관계에서 초래되었다. 아마도 ‘업業(Karma)’은 개인 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적용되어 소지왕의 할아버지 눌지왕이 고구려와의 관계를 배신(신라의 입장에서는 독립을 한 것이다)한 것을 손자인 소지왕이 감당해야만 했다. 400년(내물왕 말, 재위 356 ~ 402)에 신라는 왜의 침입을 받았다.157) 신라는 고구려(광개토왕 재위시)에 지원병을 요청하였고 고구려는 5만의 병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구해주었다. 그 와중에 내물왕은 죽고 실성왕이 왕권을 잡았다. 그리고 왜와의 강화가 협상되면서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는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갔고, 셋째 아들 미사흔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갔다.(후일 박제상이 그의 천부적인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눌지왕의 두 동생들을 구해 귀국시켰다. 하지만 그는 왜국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나는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라는 애국충정의 말을 마지막으로 화형당했다. 부인 치술은 남편 박제상이 왜국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치술령에서 망부석이 되었다. 물론 ‘치술령’은 후일에 부쳐진 이름일 것이다. 치술공주는 실성왕의 딸이다. 화랑세기에는 치술공주에 관하여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실성왕이 내물왕의 맏아들 눌지까지 고구려에 불모로 보내려다가, 서라벌에 있던 고구려 군사들의 도움으로 눌지는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이 왕이 신라의 제19대 눌지왕(재위기간 417 ~ 458)이다. 비록 고구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영원히 고구려의 속국처럼 지내면서 왕노릇을 할 수가 없어서 박제상을 고구려로 보내서 볼모로 가있던 동생 복호를 구해 오게 하였고, 백제와 동맹을 맺으면서 고구려를 배신하였다. 고구려의 장수왕으로서는 배은망덕한 신라가 괘씸하기가 짝이 없었지만 그에 앞서 백제를 먼저 정벌해야 되는 과제가 있었다. 그리고 575년 백제의 한성을 총공격해서 개로왕을 죽이고 백제를 웅진(공주)으로 밀어 내렸다. 나제동맹에 의하여 신라의 군사들이 출동했었지만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다. 고구려의 기세가 동아시아에서 최강으로 치닫고 있을 때인 579년, 신라의 소지왕은 아버지 자비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으로 신라는 최대의 위기를 맡고 있었다. 157)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신라에 비해 열세에 있던 백제가 신라와 경쟁관계에 있던 가야를 부추겨 가야의 영향력 아래 있던 왜의 소국들과 연합해서 대대적으로 신라를 침공케 하였다. 신라는 서라벌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여 왕성을 지키고 낙동강 하류지역을 얻고 가야를 퇴패시켰지만, 고구려에는 왕족들을 볼모로 보내고 그 후 오래동안 속국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그 전쟁으로 인하여 심한 충격을 받은 내물왕은 죽었고, 장자인 눌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왕이 왕위를 이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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