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8. 샌드크리크 대학살 (2) |
보스톤코리아 2015-11-23, 12:38:56 |
샤이엔족과 아라파호족에 대한 샌드크리크 대학살 (계속) 세상에는 어떤 경우에도 의인이 있기 마련이다. 시빙턴의 말도 안되는 인디언 학살명령에 대하여 정면으로 저항한 세 명의 장교가 있었다. 사일러스 소울(Silas Soule) 대위, 조셉 크레이머(Joseph Cramer) 중위, 그리고 제임스 코너(James Conner) 중위가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본인들은 물론이고 부하들에게도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후에 학살의 진상을 조사하는 위원회에 출석하여 그날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그런데 이 중 소울 대위는 후일 시빙턴을 추종하는 한 백인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11월28일 저녁 8시 시빙턴은 앤소니 소령 부대를 포함하여 약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학살현장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길 안내자로 69세의 혼혈 흑인 노인 벡워스(James Beckwourth)를 데리고 갔으나 도중에 그를 버리고 한 농가에서 백인과 샤이엔추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로버트 벤트(Robert Bent)를 붙잡아 강제로 길 안내자로 끌고 갔다. 공격은 이튿날 새벽에 일제히 시작되었다. 깊은 잠에 들어 있던 인디언 캠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검은 주전자는 그의 천막에 워싱턴 방문에서 받아온 성조기를 매달아 두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워싱턴에서 들었듯이 성조기가 걸려 있는 한 미군이 공격하지 않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많은 인디언들이 빗발치는 총알 세례를 피하여 검은 주전자의 티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시빙턴의 군대는 성조기 깃발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해왔기 때문에 검은 주전자의 천막으로 피신했던 사람들도 황급히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샌드크리크에는 약 600명의 인디언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남부샤이엔족이 대부분이었고 니워트(Niwot) 추장을 포함한 아라파호족이 약간 섞여 있었다. 이 날 젊은 남자들은 거의 다 사냥을 나갔기 때문에 부녀자와 어린아이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광란의 살인극으로 인하여 남자 28명을 포함하여 133명의 인디언들이 사망하였다. 이런 종류의 대량 학살은 특정인종을 제거할 목적으로 자행되는 제노사이드 (genocide)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참극의 실상이 정확하게 알려지기 전까지는 일시적으로 이번 인디언에 대한 공격은 정당한 전쟁행위로 인식되어 시빙턴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날 있었던 대학살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이 증언함으로써 진상이 하나씩 들어났다. 길 안내자로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끌려갔던 혼혈인 로버트 벤트와 역시 프랑스 아버지와 샤이엔족 어머니를 가진 혼혈인으로 샌드크리크 캠프에 머물고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에드문드 게리에(Edmund Guerrier) 등이 후일 자세하게 그 날의 참상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시빙턴에 정면으로 항명했던 세 명의 장교들도 후일 군 조사기구와 연방의회의 진상조사위원회에 세세히 진실들을 증언하였다. 이 때 윈쿱 소령은 군 조사기구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윈쿱은 제대 후 1866년에 남부샤이엔과 아라파호족 인디언 담당 정부 측 주재원(agent)으로 활동하다가 1868년 12월에 와시타 강 전투에서 미군이 검은 주전자(Black Kettle)의 마을을 파괴한 데에 대하여 항의하여 사직해 버렸다. 증언에 의하면, 인디언들을 사살한 후에도 시신에다 몹쓸 짓들을 저질렀다고 한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시신에서 성기를 도려내어 무슨 전리품인양 가져갔다. 어떤 미군은 남자의 성기를 담배쌈지로 쓰겠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기도 하고 또 다른 미군은 여자의 성기를 막대기에 걸어 전시하겠다고 큰소리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증언자들은 또한 실제로 많은 병사들이 여자의 성기를 도려내어 말안장에 걸치거나 모자에 장식품으로 꼽고 다녔다는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군들은 덴버의 아폴로극장이나 그 지역의 술집 같은 곳에 이러한 볼썽사나운 전리품들을 공개적으로 전시해 두었다고 한다. 소울 대위가 윈쿱 소령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서 태아를 끄집어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700명의 병력이 새벽시간에 무방비상태로 잠에서 덜 깨어난 600명의 인디언 그것도 대부분이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디언 측 사망자는 의외로 적은 편이었다. 아마도 잘 훈련된 군인들이었더라면 거의 전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나 전혀 그렇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사격술도 형편없었을 뿐만 아니라 군기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것 같고 심지어 행군 도중에 많은 술을 마신 탓에 채 술이 깨기도 전에 학살극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측도 약 50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는 자기네들끼리의 사격 실수로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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